조영남 지음/민음사/각 2만2000원∼2만5000원 |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10여년간의 중국정치 연구 결과를 3권의 책으로 펴냈다.
조 교수는 우선 객관적으로 중국의 실체를 바라보길 기대한다. 그간 미국 일본 등 서구 스타일의 학자들은 대부분 비판적으로 중국을 조망해 왔다. 국내외에 널리 퍼진 중국정치에 대한 시각은 편향돼 있었다.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에 모인 수만명의 학생들이 민주개혁을 외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뒤에 학생들이 세운 흰색의 ‘민주의 신’ 동상이 마오쩌둥 사진을 가리고 있다. 왼쪽은 덩샤오핑. 민음사 제공 |
저자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경제적 성공의 요인을 촘촘히 들여다본다. 중국의 무엇이 지금의 성공을 이뤘는지, 핵심 요인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곧 향후 중국을 예측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파벌과 투쟁 -1983~1987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2 |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패한 공산당 일당 독재의 리더십과 경제 성장을, 중국은 동시에 이뤘다. 저자는 그 요인을 세 가지로 압축한다.
덩을 중심한 강력하고 통찰력 있는 정치 리더십이 첫째이고, 효과적인 정치제도의 수립과 유능한 당정 간부가 있었으며, 적절하고 실현 가능한 정책의 선택이다.
마오쩌둥 사후 혁명 원로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덩의 개혁개방을 지지했다. 덩은 마오쩌둥의 신임으로 총서기에 오른 화궈펑을 빠른 속도로 물리친다. 이어 덩은 외자를 끌어들여 전면적인 개혁개방에 나설 수 있었다. 덩의 핵심 전략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당-국가 통제’였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큰 나라를 통제하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효율적이었다.
톈안먼 사건 -1988~1992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 |
그러나 개혁기에는 달랐다. 노선이 다른 파벌들이 서로 경쟁했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덩샤오핑과 천윈 간의 관계가 그랬다. 천윈은 덩의 개혁개방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덩을 정적으로 여겨 몰아내려 한 적은 없었다. 물론 후야오방이 보수파의 공격으로 사라졌지만 모든 파벌투쟁이 권력투쟁에 골몰한 것은 아니었다.
덩은 1980년대 말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를 위시한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그룹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즉각 지식인과 학생들의 공분을 샀다. 1986년 11월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촉발시켰다. 정치민주화를 내세운 후야오방 실각 이후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자오쯔양 역시 적극적인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덩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치개혁은 민생문제 해결 이후 점진 추진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확고했다. 다시 말해 덩은 권력 독점을 위해 공산당 일당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덩은 사회주의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덩은 “사회주의 국가에는 큰 장점이 하나 있다. 어떤 일이든 한번 결심하면 바로 결의가 나올 수 있고, 견제받지 않고 즉각 집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책 결정과 집행의 효율성 면에서 일당체제가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덩은 서구식 시스템, 즉 견제와 균형의 삼권분립, 다당제, 의회제를 몹시 싫어하고 경멸했다. 그래서 덩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대로 도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 시진핑 정권은 이 노선을 충실히 따르면서 반서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덩은 1970년대 후반 ‘설계도 없는 집 짓기’로 불린 개혁개방 정책을 구체화했다. 톈안먼 사건 이후 보수파의 정국 주도권 장악을 남순강화로 극복했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국봉쇄를 이겨냈다.
저자는 덩샤오핑 시대와 오늘날 중국을 “위인은 떠났지만 유산은 영원히 남는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우리 학계에는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현상’, 더 나아가서는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않으려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편향된 연구 경향을 바로잡고 그동안 부족했던 거시적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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