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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페미니즘의 귀환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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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03 01:06:38 수정 : 2017-02-03 18: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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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세지고 당당해진 여자들, 여성비하 맞서 SNS 연대 활발 / 폭력반대 온라인 서명한다며 서약까지 하라니 왠지 착잡 1980년대 대학에 다녔던 필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세례하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노동해방의 끝에는 여성노동자의 해방이, 해방신학의 끝에는 여성성직자의 권익이, 민주와 자유의 끝에는 여성의 성(性)적 주체성과 자유가, 페미니즘의 끝에는 여성공동체가 있었다. 좀 관념적이고, 좀 근본주의적이고 그래서 좀 과격했다. 90년대에 접어들자 80년대를 사로잡았던 이데올로기와 신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페미니즘도 점차 ‘한물간’, ‘이제는 필요 없는’ 듯했다. 그리고 2016년, 화력을 업그레이드한 ‘뉴-’한 페미니스트들이 몰려왔다. 블랙홀급 ‘국정농단’에 가려지긴 했으나, 올해의 핫이슈 중 하나는 페미니즘의 귀환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운동에서 발화돼 낙태합법화 논쟁, 생리대 가격인하 퍼포먼스, 소라넷 폐쇄운동, 문단을 비롯한 문화계 성추행 논란 등 굵직한 쟁점이 모두 페미니즘의 파장 안에서 이루어졌다.

지난해,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이슬람국가(IS)를 좋아한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시리아로 떠난 ‘김군’이 있었다. ‘그래서(So)’로 연결된 앞 문장과 뒷문장 사이에는 크레바스와도 같은 단애가 있었다. 증오가 증폭되면 공포와 공격을 낳는다. 여성혐오가 여성공포증을, 여성성공포증이 여성살해를 부르는 이유다. 이런 여성혐오, 여성비하, 여성폭력에 맞서 여성이 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적이고 일상적으로, 감정적이고 도발적으로!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시인
올해 출판시장에서도 페미니즘은 핫아이템이었다. 봇물이 터지듯 신작만 100권을 넘겼다. 베스트셀러였던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는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옳고 그른 방법은 없다. 핑크색을 좋아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택하겠다”고. ‘뉴-’한 페미니스트들은 ‘나쁜 페미니스트’를 자청한다. 기꺼이 드센 년, 독한 년, 성난 년, 수준 떨어지는 년이 되고자 한다. 분노와 슬픔,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적극 드러내면서 정치화시키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공격적 반사(反射), 즉 미러링 전략을 구사한다.

이들의 주체는 20대 여성들이다. 쌍팔년도 이후에 태어나 가정이나 학교에서 별다른 남녀차별 없이 자라며 페미니즘을 철 지난 구호처럼 여겼다. 헌데, 자신들의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막막한 삼포세대가 돼 있었고, 영문도 모른 채 여혐의 대상이 돼버린 동세대적 경험의 주체들이다. 여기에, 괜찮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게 현실적으로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으나 취업이나 양육의 벽에 부딪혀 ‘경단녀(경력 단절녀)’가 된 30대 이후 여성들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자신의 일기장보다 편한 ‘수시로 욱하는’ 10대 여성들이 적극 동참하고 있다. 때로 ‘게녀(게시판에 댓글을 다는 여성)’라 불리는 이들은 SNS상의 연대를 기반으로 그 전선을 실생활에 펼치곤 한다. 직설적인 ‘현실 언어’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읽으며, 지지하고 연대한다. 카톡, 밴드,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에서 민첩하게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 대응을 모색한다. 최근에는 SNS 해시태그(특정 주제에 대한 글임을 알리는 # 표시) 캠페인을 통해 해당 기관과 단체에 젠더폭력 근절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나아가 전 세계의 여성과 연대하고 국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한다.

며칠 전, 나 같은 SNS 문맹자에게도 문자 한 통이 왔다. 후배 여성시인이었다. “문단 내 성폭력에 반대하는 작가 서약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 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둘. 나는 성폭력·위계 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셋. 크고 작은 폭력의 형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겠습니다….” 온라인 서명을 하며 좀 참담해졌다. 이 기본적인 사항을 지켜야 한다며, 무슨 비밀결사대처럼 서약까지 하고 연대를 해야 하다니, 아직도!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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