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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흑백 사진 한 장이 있다. 그 시절에도 컬러는 흔했을 텐데 누가, 왜 흑백으로 찍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십대의 파릇파릇한 젊은이가 선후배들과 함께 시청 앞 광장에 서 있다. 광장 좌우로 차들은 보이지 않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만 가득하다. ‘87년 6월항쟁’이 이루어낸 해방구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아직 미혼이고 미래에 어떤 식솔이 생겨날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마냥 젊은 친구일 뿐이다. 저 젊은이는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하고도 저 시점까지 이십대라는 청춘을 군사 독재 아래서 암울하게 보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막 접어드는 순간을 기념하고 있다.

그때로부터 한 세대가 바뀌는 대략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저 젊은이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저 또래가 되어 오늘도 다시 광장으로 나가겠다고 한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저 젊은이는 생업에 코를 박고 살다가 어이없이 과거로 되돌아간 상황을 접하곤 허탈해한다. 지난 시절 광장이 정리되고 난 후 개인의 ‘밀실’이 너무 소외돼 있었다는 자각으로 일본의 사소설을 닮은, 내밀한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문학작품이 크게 유행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아주 미미해졌고, 작금은 아예 존재감조차 희미해진 형국이 돼버렸다.

광장과 밀실이 조화를 이루는 문학이야말로 한 시대의 사회적 환경과 개인들의 삶을 두루 조화롭게 보듬는 이상적인 것이라는 언설에 토를 달기 어렵다. 다시 광장이 밀실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저 광장의 들끓는 함성과 뜨거움 앞에서 밀실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만큼 엄중한 상황이고 압도적인 분노를 주체하기 힘든 이즈음이다. 이런 때일수록 개인들의 정신건강이 중요하겠지만, 전쟁터처럼 그것을 배려할 여유는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어느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쓰든 밀실에서 차분하게 그것에 몰입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1960년 4·19 혁명이 연 해방공간에서 나온 최인훈의 ‘광장’은 밀실도 광장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주인공 명준은 지상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안주할 밀실을 찾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여느 때 같으면 세모의 분위기가 시작될 광장에 오늘도 많은 이들이 분노의 촛불을 들고 모여들 것이다. 저들의 유린된 밀실을 누가 어떻게 책임지고 보상할 텐가. 자신들만의 밀실을 벙커로 만들어 은둔하며 광장을 조롱하고 유린하는 이들은 또 누구인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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