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육아휴직 실태 리포트] 친척집 돌다 '학원 뺑뺑이'… "난 늘 미안한 엄마"

관련이슈 심층기획-육아휴직 실태 리포트

입력 : 2017-02-20 21:41:49 수정 : 2017-02-20 21:41:4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우울한 워킹맘의 삶
'
“가난했기에 일을 그만둘 수 없어 아이들을 사실상 방치했어요.” 1986년 첫 아이를 낳은 김혜숙(60)씨에게 육아는 죄책감, 불안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죽고 싶었다”며 1980년대 중후반을 회상했다. 당시 엄마가 된 그를 보호해주는 제도는 1953년 ‘60일 산전후휴가’를 명시한 근로기준법이 유일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둘도 많다’ 등 출산억제정책이 시행된 시기여서 맞벌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도움은 전무했다. 1979년 건강보험공단의 전신인 의료보험관리공단에 입사한 덕에 60일 산전후휴가 혜택은 모두 누렸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어린애를 두고 복직하면서 겪은 고생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됐다.


3개월 된 아기는 두 달간 시누이에게 맡겨졌다가 시고모→베이비시터→시누이→시어머니의 품을 전전했다. 당시 그의 월급은 약 27만원. 베이비시터에게는 급여의 3분의 1 이상(10만원)을 지급했다.

남편이 갓난아기를 안고 서울 마포구에서 경기도 양평까지 ‘총알 택시’를 탄 적도 있다고 한다. 아이를 돌보던 시누이가 몸져눕게 되면서였다. 김씨보다 출근시간이 늦었던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친척을 급히 물색해 데리고 갔다. 이렇게 여러 사람을 오가며 자란 아들이 “나는 어린 시절에 외로움밖에 몰랐다”고 했을 때 김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희 부부가 양가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가 아이들을 키웠을 거예요. 그때는 연차, 반차, 육아휴직 뭐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죠. 요즘에도 아이 키우기 힘들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지금은 천국이에요.”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을 통해 육아휴직 제도가 도입됐고 정부에서도 1990년대 중반 출산억제정책을 종료했다. 1995년 아이를 낳은 김명기(51)씨는 당시 과학기기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에 다녔다. 아이는 생후 한 달 만에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겨졌다. 김씨는 월급 100만원을 받아 보모에게 절반을 지급했다.

아이 돌 무렵부터는 시댁에 들어가 살았다. 시어머니는 ‘황혼 육아’를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아기 아빠 월급만으로는 살기 어렵다”고 김씨가 하소연했다. 그 때문에 집안 살림은 온전히 김씨 몫이 됐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밥 짓고 퇴근 후 달려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등 집안일에 시달렸다.

아이가 5살이 됐을 때는 ‘학원 뺑뺑이’를 돌렸다. 시어머니가 오전 10시에 미술학원에 데려다주면 아이는 검도, 태권도 등 여러 학원으로 옮겨다녔다. 학원 여러곳을 다녀도 김씨의 퇴근시간보다 일렀다. 아이가 할머니 없이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는 날도 많았다.

“꼬마애가 텅 빈 집에 혼자 있는데 그 애가 내 새끼라고 생각해보세요.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납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애한테 미안해져요. 지금은 주변에 어린이집도 많고 정부에서 도움도 주잖아요. 저는 요즘 사람들이 부럽네요.”

2000년대 들어 저출산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며 정부에서는 2005년부터 본격 출산장려 정책을 펼쳤다. 2007년 남성 출산휴가가 도입됐고 2013년 영유아 무상보육이 시작됐다.

2009년 첫 아이를 낳고 2015년 둘째를 출산한 최성은(39)씨는 둘째 때 그의 직장에서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서울시 중구의 한 소형 병원에 첫 육아휴직 깃발을 꽂았다. 임신 기간 내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정을 동료 간호사들에게 호소했다. 최씨는 “육아휴직에 대해 대놓고는 말 못하고 찔끔찔끔 의사를 내비쳤다”며 “법에 보장된 내 권리를 사용하는 건데 답답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아이를 직접 품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휴직 9개월째에 최씨 자리에 투입된 대체직원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서 탈이 났다. 3교대로 근무하는 업무 특성상 1명의 부재는 큰 타격이었다. 동료들로부터 “너무 힘들어 미치겠다”는 연락이 이어졌고 회사에서도 복직을 권유했다.

출산 직후 국공립어린이집에 입소 신청을 했으나 대기 순위는 여전히 200번대였다. 남편의 육아휴직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종일보육이 되지 않는 가정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냈고 베이비시터를 따로 구했다. 복직 3일 전까지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극적으로 좋은 분을 만났지만 아이와 적응하는 시간을 갖지 못해 복직 첫날부터 반차를 썼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현재 최씨의 육아는 언제든 하나가 끊어질 수 있는 불안한 고리가 맞물린 형태로 돌아가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는 학교를 마친 뒤 학원을 전전하고 세살짜리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뒤 베이비시터와 시간을 보낸다. 학원이 쉬거나, 어린이집이 방학하거나, 베이비시터가 아프거나, 베이비시터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면 쩔쩔매며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들 돌봄 비용으로는 매달 약 150만원이 나간다.

“어린이집을 공짜로 보낼 수 있게 됐어도 아이들 돌보는 비용은 여전히 많이 듭니다. ‘믿고 맡겨야지’ 하면서도 아동학대 등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불안에 떨게 되고요. 또 저만 육아휴직을 하다 보니 전업주부 생활을 하는 동안 남편의 가사 참여가 확연히 줄었고 복직 이후에도 같은 상황이 이어지게 됐어요. 과연 일하는 엄마의 상황은 나아진 걸까요?”

기획취재팀=윤지로·김준영·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