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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갓난아기를 안고 서울 마포구에서 경기도 양평까지 ‘총알 택시’를 탄 적도 있다고 한다. 아이를 돌보던 시누이가 몸져눕게 되면서였다. 김씨보다 출근시간이 늦었던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친척을 급히 물색해 데리고 갔다. 이렇게 여러 사람을 오가며 자란 아들이 “나는 어린 시절에 외로움밖에 몰랐다”고 했을 때 김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희 부부가 양가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가 아이들을 키웠을 거예요. 그때는 연차, 반차, 육아휴직 뭐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죠. 요즘에도 아이 키우기 힘들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지금은 천국이에요.”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을 통해 육아휴직 제도가 도입됐고 정부에서도 1990년대 중반 출산억제정책을 종료했다. 1995년 아이를 낳은 김명기(51)씨는 당시 과학기기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에 다녔다. 아이는 생후 한 달 만에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겨졌다. 김씨는 월급 100만원을 받아 보모에게 절반을 지급했다.
아이 돌 무렵부터는 시댁에 들어가 살았다. 시어머니는 ‘황혼 육아’를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아기 아빠 월급만으로는 살기 어렵다”고 김씨가 하소연했다. 그 때문에 집안 살림은 온전히 김씨 몫이 됐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밥 짓고 퇴근 후 달려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등 집안일에 시달렸다.
아이가 5살이 됐을 때는 ‘학원 뺑뺑이’를 돌렸다. 시어머니가 오전 10시에 미술학원에 데려다주면 아이는 검도, 태권도 등 여러 학원으로 옮겨다녔다. 학원 여러곳을 다녀도 김씨의 퇴근시간보다 일렀다. 아이가 할머니 없이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는 날도 많았다.
2000년대 들어 저출산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며 정부에서는 2005년부터 본격 출산장려 정책을 펼쳤다. 2007년 남성 출산휴가가 도입됐고 2013년 영유아 무상보육이 시작됐다.
2009년 첫 아이를 낳고 2015년 둘째를 출산한 최성은(39)씨는 둘째 때 그의 직장에서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서울시 중구의 한 소형 병원에 첫 육아휴직 깃발을 꽂았다. 임신 기간 내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정을 동료 간호사들에게 호소했다. 최씨는 “육아휴직에 대해 대놓고는 말 못하고 찔끔찔끔 의사를 내비쳤다”며 “법에 보장된 내 권리를 사용하는 건데 답답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아이를 직접 품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휴직 9개월째에 최씨 자리에 투입된 대체직원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서 탈이 났다. 3교대로 근무하는 업무 특성상 1명의 부재는 큰 타격이었다. 동료들로부터 “너무 힘들어 미치겠다”는 연락이 이어졌고 회사에서도 복직을 권유했다.
출산 직후 국공립어린이집에 입소 신청을 했으나 대기 순위는 여전히 200번대였다. 남편의 육아휴직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종일보육이 되지 않는 가정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냈고 베이비시터를 따로 구했다. 복직 3일 전까지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극적으로 좋은 분을 만났지만 아이와 적응하는 시간을 갖지 못해 복직 첫날부터 반차를 썼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린이집을 공짜로 보낼 수 있게 됐어도 아이들 돌보는 비용은 여전히 많이 듭니다. ‘믿고 맡겨야지’ 하면서도 아동학대 등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불안에 떨게 되고요. 또 저만 육아휴직을 하다 보니 전업주부 생활을 하는 동안 남편의 가사 참여가 확연히 줄었고 복직 이후에도 같은 상황이 이어지게 됐어요. 과연 일하는 엄마의 상황은 나아진 걸까요?”
기획취재팀=윤지로·김준영·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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