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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고개 아리랑'-국가의 토지강탈 의혹 사건] "장남 이(李)씨 소 취하 거부하자 대공분실서 온갖 고문·협박"

입력 : 2017-02-13 18:48:53 수정 : 2017-10-13 11: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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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 보안사 개입 어떻게 진행됐나/이갑수씨 장남 이상권씨의 땅 찾기/점심 먹고 나오던 식당 앞 연행/소 취하·포기각서 쓴 후 풀려나/고문 후유증에 3년 후 결국 숨져/담당변호사도 끌려가 인격 모욕
사위 송세관씨도 나섰지만/2심 도중 보안사서 40여일 감금/손톱밑 찌르기·전기 충격 가하기/끊임없는 고문에 수도 없이 기절/출소 후엔 서울시경서 압박받아

#장남의 투쟁과 보안사 개입

 

조선 영응대군 16대손 고 이갑수씨의 4녀 이상연씨와 남편 송세관씨 부부는 한씨 등의 제보와 자신들이 확인한 내용을 종손인 이상권(1979년 사망)씨에게 알렸다. 장남 이씨는 이에 쑥고개 일대의 전체 토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는 점 때문에 우선 봉천동 산 174-9번지에 대해서만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사위 송세관씨의 투쟁

 

“이대로 침묵하면 앞으로 더욱 잔혹한 시련이 올 것이다. 직접 나서겠다.”

 

이갑수씨의 4녀 이상연씨의 남편 송씨는 요양 중이던 이상권씨를 찾아가 이렇게 거듭 설득했다. 처음에는 매제의 신변 안전을 우려해 주저하던 이씨도 결국 사건 내막을 송씨에게 전해줬다. 송씨는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이씨로부터 서울 봉천동 땅을 매입하는 계약서를 작성한 뒤 1976년 10월 ‘땅찾기 소송’을 제기했다. 소 변호사를 비롯해 홍모, 김모 변호사를 내세웠다.

1심 판결이 이뤄진 1978년이 되자 송씨에 대한 위협과 협박도 거세졌다. 매일 집 대문 앞에서 짧은 머리의 괴한들이 험악한 말을 쏟아냈다.

 

“좋은 말 할 때 소 취하하고, 살고 싶으면 하루라도 빨리 취하해라!” “야, 너희 ××들 심장은 칼이 들어가지 않는 쇠덩어리냐? ×××는 철판 깔았냐?”

 

그는 협박이 계속되자 사설 경비원까지 고용했다. 하지만 송씨의 노력에도 △1978년 3월15일 1심 △1979년 9월21일 서울고법 2심에서 연달아 패소했다. 판결 요지는 이갑수씨가 1945년 2월 종중으로부터 샀다는 매매계약서 등 증거가 확실치 않고, 땅이 분할등기된 뒤 일부만 이씨에게 팔린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었다. 

 

 

사위 송세관씨.

#“보안사 고문 및 소취하 강요” 증언

 

송씨도 2심 도중에 보안사에 끌려가 폭행과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송씨 증언에 따르면 1978년 8월7일 오전 8시 그는 보안사로 납치됐다.

 

“아침에 집으로 ‘부산에서 심부름을 왔다’는 전화가 와 사무실 앞 다방으로 나갔다. 구석에 마른 사람이 앉아 있길래 ‘방금 전화한 사람이 맞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답하더라. 그래서 막 얘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뒤에서 ‘송세관이 어떤 ××야’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고개를 돌려보니 세 사람이 들어왔다.”

 

송씨는 이들에 의해 겨드랑이를 붙잡혔고, 밖에 대기 중인 지프차에 태워져 서울 모처로 납치됐다고 한다.

 

송씨는 그곳에서 “지금 진행 중인 민사소송을 취하하고 다시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 당장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가 거부하자 40여일간의 감금과 고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가 받았다는 고문의 종류는 그야말로 다양했다.

 

이쑤시개로 손톱밑 찌르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돌리기,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봉 집어넣고 거꾸로 매달기, 젖은 물수건을 코에 덮어씌우고 거꾸로 매달기, 물수건을 코에 씌우고 고춧가루물 붓기, 물통에 집어넣고 전기 충격 가하기….

 

고문이 이어질 때마다 그는 수없이 까무러치고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그는 10여명이 자신의 고문에 참여한 것 같다고 기억했다.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저들 말대로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버리겠지만, 나는 가족이 있어 날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면 결국 문제가 드러날 것이다.’ 송씨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고 한다.

 

하지만 보안사 관계자들은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송씨를 보안사에 불러 조사한 일 자체가 없다”고 했고, 고문 사실도 부인했다. 하지만 송씨는 “보안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시에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자신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보안사 공문 국군보안사령부가 1978년 11월 20일 이갑수씨 후손의 땅 소송과 관련해 ‘처남 이상권씨가 보안사에 감금돼 폭행 고문을 당했다’는 송세관씨의 진정서에 대해 회신한 공문. 보안사는 보안사령관 직인이 찍힌 이 문서를 통해 이상권씨를 임의 동행해 약 10일간 조사를 벌인 사실을 인정했다.(위 빨간색 사각형 부분)

#서울시경에서도 조사받아

 

송씨는 감금 40일째인 9월17일쯤 보안사에서 나왔다. 그가 차에 실려 출소할 때 건물에는 ‘국군서울지구병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보안사는 모두 위장간판을 내걸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실제 ‘동아일보’ 1990년 10월9일자 7면의 ‘월권 말썽 잦은 5공 창출의 전위’ 기사에도 “‘민간인 고문’ 주도한 공포의 대명사 국군보안사령부 정문에는 엉뚱하게도 ‘국군서울지구병원’이란 간판이 내걸려 있다”며 보안사 본부와 예하 부대 모두 위장간판을 내걸고 있다고 보도했다.

 

송씨는 이후 바로 석방되지 못하고 서울시경 지능계로 인계됐다. 그는 그곳에서도 담당 경찰 김모 경사로부터 소취하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너의 신상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불행이 닥쳐올 것이니 소를 취하하라, 만일 취하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감옥에 처넣어 한 10년 푹 썩히겠다.”

 

송씨가 김 경사의 제안을 거부하자 사기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하지만 영장은 기각됐고, 그는 풀려날 수 있었다.

 

송씨는 풀려난 직후인 9월20일 자신이 당한 억울한 사정을 청와대에 진정했다. 이에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1969년 10월∼1978년 12월까지 재직)은 그해 11월 중정과 보안사, 치안본부 등에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결국 서울시경의 김 경사는 파면됐다. 나중에 치안본부가 김 경사에 대해 송씨를 불법수사했다며 파면조치 의견을 청와대에 보고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송씨는 잇단 패소에 실망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건의 배후를 듣게 된다.

 

특별기획취재팀=김용출·백소용·이우중·임국정 기자 kimgija@segye.com

영상편집=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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