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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민주주의를 구한다"

입력 : 2017-02-27 21:45:39 수정 : 2017-02-27 21:4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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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대선 앞둔 정치권, 앞다퉈 “나는 페미니스트” / ‘인권의 나라’ 프랑스, 1946년에야 여성참정권 / 지난해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페미니즘 ‘불씨’ / ‘미러링’ 등 온라인서 일부 과격한 모습은 ‘숙제’ / “페미니즘은 소수자 인권감수성 높이는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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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이 페미니스트였습니다.”

정치권 안팎에서 ‘벚꽃대선’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가운데 최근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소개하는 정치인들이 부쩍 늘고 있다. 지난 23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대선 국면이 되니 (후보들이)‘페미니스트’ 합창을 하고 있다”며 “제가 대통령이 되면 여성들의 권리가 획기적으로 신장될 것”이라며 각종 여성정책을 약속했다. 앞서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도 각각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
정치인들의 모습을 두고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한 것’이란 지적도 나오지만, 최근 달라진 우리사회를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현상이란 평가다. 지난해 서점가에선 ‘페미니즘’이 핵심 키워드였고, 온·오프라인에 걸쳐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높아진 관심 때문인지 최근 국립국어원은 그동안 지적받았던 ‘페미니즘 :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란 정의를 삭제하기도 했다.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왼쪽), 이재명 성남시장.
◆페미니즘, ‘참정권 투쟁’의 역사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한 단어로, 국학자료원에 따르면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20세기 이전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여성은 오랜 기간동안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여성의 노동권과 참정권 등을 기치로 삼은 투쟁들이 나타나게 된다.

페미니즘은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19세기 봉건적 신분질서가 무너진 뒤 현대적 의미의 민주선거가 들어서는데 여성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의 페미니즘은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 영국의 울스턴크래프트(1759∼97)가 쓴 ‘여성의 권리옹호’(1792)란 책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이 책은 출간 당시 세간의 조롱과 질타를 받았지만, 1890∼192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벌어진 참정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은 주로 남성과 동등한 노동권과 교육권 등을 주장했는데, 특히 ‘내 손으로 정치인을 뽑는’ 참정권이 주된 투쟁 목표였다. 실제로 여성 투표권은 페미니스트들의 투쟁과 함께 1893년에 이르러서야 뉴질랜드에 처음 등장했고, 이후 호주(1902), 핀란드(1906), 노르웨이(1913), 덴마크(1915) 등으로 일부 확산하지만, 1920년대 전까지는 북유럽 몇몇 국가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1870년 흑인노예에게 참정권을 준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반세기가 지난 뒤인 1920년이었고, ‘인권선언의 나라’ 프랑스에선 1946년에야 비로소 여성 참정권이 법률로 보장됐다. 1946년은 북한에서 여성들이 투표에 처음 참여한 해이기도 하다. 2015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등 전세계적으로 여성들의 참정권이 보장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인권과 평등이 강조되는 21세기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적 구조가 여전하단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이다.

◆한국의 페미니즘,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타올랐다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는 1898년 만들어진 ‘여우회(女友會)’로 알려졌다. 50여명이 활동한 이 단체는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순성여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 고종에게 ‘후궁을 두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 덕수궁 앞에서 장대에 속옷을 매달고 축첩반대 연좌시위를 1주일여 진행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회장인 정형숙씨를 비롯한 회원들은 자신들이 독립된 여성임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 이름을 쓴 어깨띠를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도시 노동자들과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을 중심으로 공산사회주의 운동과 연계해 ‘남녀평등’, ‘가부장제 폐지’ 등 여성해방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0∼70년대 여성운동은 독재정권을 지지하거나,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고, 1980년대엔 여성들이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때의 여성운동은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뒤섞이면서 정체성이 모호했단 평가가 많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성폭력 추방’, ‘성차별 인식 개선’, ‘법제도 개정’ 등 구체적인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게 된다.
최근 불고있는 페미니즘 ‘열풍’은 지난해 5월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이 불씨를 댕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한 주점의 공용화장실을 이용하던 23세 여성이 30대 남성에게 흉기로 수차례 찔려 목숨을 잃었다. 이후 각계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성폭력 사례나 ‘여성혐오’ 실태를 고발하고 우리사회 내 성차별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27일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분석 사이트에 ‘페미니즘’이란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관련된 ‘언급 추이’는 1990년(5건), 2000년(340건)이었던 것이 2015년(492건)에 이어 지난해 720건으로 크게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온라인을 중심으로 페미니스트 단체가 여럿 나타나고,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성들은 왕자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새겨진 티셔츠를 입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페미니즘 바람에 최근 젊은 여성층에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거침없이 밝히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딜 가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다는 이모(29·여)씨는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면 날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면서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차별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여성들이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계속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젊은 여성들의 움직임도 두드러지고 있다. BWAVE(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를 벌이는 여성 모임)는 25일 부산에서 “여성인권을 보장하고 임신중단을 합법화하라”며 낙태죄 처벌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부터 서울 광화문에서 시위를 진행한 BWAVE는 특정 단체에 소속된 여성은 제한하는 등 철저한 개인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OECD 회원국 중 한국 등 9개 국가를 제외한 25개 국가에서 임산부 본인 요청에 따라 낙태가 가능하다”, “낙태가 불법인 한국에선 섹스가 방사능보다 위험하다”는 등 주장을 펼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안고 있는 숙제들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곤 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에 시달리곤 한다. 또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을 아우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안겨진 숙제로 평가된다.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란 명제도 남아있다. 여성운동의 역사가 100년이 넘고, 아시아 국가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비교적 높은 유럽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단일한 이론 체계 없이 여러 갈래로 여성운동이 진행되는 등 페미니즘을 단칼에 정의하기란 쉽지 않은 형편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캐롤린 라마자노글루는 저서 ‘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1997)에서 “페미니즘이 ‘남성에 의한 억압’이란 여성으로서의 공통된 이해에서 출발했지만,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간과해 모순에 빠지게 되면 결국 정치적 실현을 약화시킨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여성들이 처한 상황, 즉 부에 따른 계급, 노동환경, 권력, 국가, 인종, 문화, 이데올로기 등 차이로 인해 남성뿐만 아니라, 구조와 환경, 여성에 의한 억압까지 나타날 수 있단 주장이다. 여성운동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우리사회에서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또 폭력적인 양상은 경계해야한단 목소리가 높다. 지난해부터 온라인 여성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국 남성들을 비하하는 등 이른바 ‘미러링’(여성에 대한 혐오표현 등을 남성을 향한 표현으로 되돌리는 것)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분노는 애초 목표인 여권 신장보다는 사회적 갈등과 편견만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강하다. 과격한 표현과 행동이 자칫 여성평등과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여성운동가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단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난해부터 이어진 페미니즘 알리기 운동이나 페미니즘·여성학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끄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페미니즘 도서 판매량은 전년에 비해 132.6%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페미니즘과 관련한 서적이 100여종 이상 출간되는 등 ‘불씨’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있는 김모(25·여)씨는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이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권리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 소수자에 대한 사회 전체의 감수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임윤옥 상임대표는 “우리 사회 전반에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관행이 여전하다”며 “법과 제도를 손질하는 것만으론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바꿀 수 없다. 각계각층에서 평등인식을 제고하고 인권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여성단체 등에선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한층 높아지길 기대하고 있다. 대선주자들이 입을 모아 “페미니스트”라고 강조하고 있는 만큼 성평등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도 가능할 수 있단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세계 여성의 날’(3월8일)을 맞이해 오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페미니스트가 민주주의를 구한다’,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란 주제로 자유발언과 1㎞가량 ‘페미니스트 행진’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주최 측은 “시민들과 함께 여성들의 권리와 성평등, 민주주의를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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