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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논픽션 비선권력] <2> '영애' 박근혜와 '은인' 김기춘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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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5 16:33:27 수정 : 2017-06-09 16: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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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 현장에서 체포된 문세광은 사건 당일인 1974년 8월15일 서울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본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문세광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신직수(1927-2001) 중앙정보부장은 이에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인 김기춘 검사를 투입했다. 1939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기춘은 경남고를 거쳐 1958년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그는 5·16 쿠데타 직전인 1960년 10월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광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공직에 들어갔다.

1988년 12월6일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기춘 신임 검찰총장(22대, 1988.12∼1990.12.) 및 국가안보회의 상근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악수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재학 중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가 주는 장학금을 받고 학업을 마쳐 나중에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들의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기춘은 1972년 법무부 검사 시절 유신(維新)헌법 초안을 만드는데 참여했고, 1974년부터 중앙정보부에서 중앙정보부장 특보를 맡고 있었다. 일본어 소설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일본어가 능숙했던 김기춘은 문세광이 독서광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어로 물었다.

“文世光氏, あなた, 『ジャッカルの日』という本を読みましたか(문세광씨, 아나타, 자카루노히토이우홍오요미마시타카·문세광씨 당신은 『자칼의 날』이라는 책을 읽어봤습니까?).”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은 1971년 영국 BBC 출신의 프레드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가 프랑스의 비밀 군사조직이 테러리스트 자칼을 고용해 사를 드골(Charles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것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 테러리스트들이 즐겨 읽는 책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사건 10여일 전 충남 대천해수욕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며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김기춘은 작품 속 주인공에 문세광을 투영시켜 말문을 열려 했다. 문세광은 눈을 번쩍 뜨며 반가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読んでみました. 先生も『ジャッカルの日』を読みましたか(욘데미마시타. 센세이모자카루노히오요미마시타카·읽어 봤습니다. 선생님도 자칼의 날을 읽었습니까?).”

김기춘은 “나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자칼 아니요?”라고 물었고, 문세광은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자칼입니다”라고 답했다. 김기춘은 이에 “이봐요 문세광씨,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처럼 당당하게 범행을 밝혀야 할 것 아니요? 당신은 혁명을 하기 위해 대통령을 저격하러온 혁명가입니다. 왜 비겁하게 말을 하지 않습니까? 혁명가답게 당당하게 설명하세요. 그게 사나이다운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라고 설득했다. 문세광은 이에 사건의 전모를 자백하기 시작했다고, 김기춘은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주장했다(박은주, 2005. 1. 21, 5면; 정녹용, 2014. 3. 20; 한홍구, 2013. 12. 28, 18-19면 참고). 
1974년 10월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육영수 여사 살해혐의로 1심 선고 공판을 받고 있는 문세광의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하지만 역사학자 한홍구는 “김기춘은 문세광이 일체의 신문에 8월16일 오후 5-6시경까지 묵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조간신문 8월16일치를 보면 문세광이 이미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진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며 김기춘의 ‘자가 발전’이라고 분석했다(한홍구, 2013. 12. 28, 18-19면 참고).

재일동포 2세인 문세광은 조총련 소속이 아닌 민단 오사카지부 사무처장이었다. 일본에서 보통 부르는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 도대체 민단 소속의 문세광은 왜 박정희를 쏘려했을까. 1972년 10월 유신에 이어 1973년 김대중(1924-2009) 납치 사건까지 발생하자 일본 교민사회는 국내와 마찬가지로 반(反)박정희 여론이 크게 일었고 민주주의 파괴와 독재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자칼의 날』을 탐독했던 문세광도 반박정희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세광은 오사카의 한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치고 지인의 호적초본 등을 빌려 가짜 여권을 만든 뒤 한국에 입국, 8월15일 박정희를 향해 권총을 뽑아든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이후 수사결과 발표에서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범행을 저질렀고 공작금은 조총련으로부터 지원받았다고 발표했다. 그는 9월12일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약 3개월 뒤인 12월17일 사형이 확정됐다. 문세광은 3일 뒤인 12월20일 오전 7시30분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75년 11월 당시 36세 젊은 나이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부장에 오른 김기춘이 ‘학원침투간첩단’ 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재심에서 관련자들이 무죄를 선고 받으며 간첩 조작사건으로 드러났다. 뉴스타파

김기춘이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면서 박근혜에겐 그가 ‘은인’으로 인식됐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한홍구는 박근혜의 입장에선 문세광을 범인으로 특정해 사형에 처하게 만든 김기춘이 어머니 육영수의 원수를 갚아준 고마운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한홍구, 2013. 12. 28, 18면 참고).

김기춘은 문세광 사건 이후 겨우 35세의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으로 발탁됐다. 중앙정보부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로 꼽히는 대공수사국 부장으로서 유신체제 유지의 대들보가 된 것이다. 김기춘은 이후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박근혜의 주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망국적인 지역 감동을 선동하는 발언을 노골적으로 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노무현(1946-2009)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에 앞장섰으며, 2012년 대선 때엔 박근혜를 지지하는 원로 모임인 ‘7인회’를 이끌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박근혜정부의 1차 균열을 가져온 2014년 11월 「정윤회문건」 파동 때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비선의 실체규명을 가로막으면서 결과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을 가져오게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비선권력기록팀=김용출·이천종·조병욱·박영준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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