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귀농인 이환의가 쓰는 농부 이반의 초록일기] 〈19〉마을 사람들은 내가 한 만큼 나를 대한다

관련이슈 귀농인 이환의가 쓰는 농부 이반의 초록일기

입력 : 2017-03-25 10:00:00 수정 : 2017-03-24 20:42:3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준만큼 돌아오는 정… 갈등 피하고 마을 일엔 앞장서야 귀농이란 말이 사회적 화두가 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전후로 시골살이를 감행하는 도시민 중 주축은 30~50대였다. 귀촌보다는 귀농에 가까웠고 부업이나 겸업보다는 전업농이 많았다. 농촌에서도 젊은 인력이 필요했기에 이들은 여러 경로로 시골에 빠르게 진입했지만 마을과 지역에서 좌충우돌했다.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다양한 사유로 탈농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비교적 가슴과 머리가 말랑말랑한 젊은 세대도 시골 사람으로 변신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그러니 이들보다 뻣뻣할 수밖에 없는 50~60대는 어땠을까. 농촌부적응이 탈농 사유 중 얼마를 차지하는지 정확히 따져본 적은 없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경제적인 문제 못지않은 비율이라 한다. 

시골(귀촌)행의 첫 관문인 지역 투어에 참여한 도시민들.
#소송,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


결국 돈도 안 되고 이웃이나 동네 사람들과 부대껴서 정리한다는 것이다. 수입이야 어느 정도 각오를 했을 테고 “늘그막에 내 맘대로 맘 편히 살아보자”는 희망조차 갑갑한 현실에 막혀 다시금 도시로 떠나는 셈이다.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을 만났다면 예외겠지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결의 여지가 보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 중 상당수 문제가 3년차 이내에 생기는 걸 보면, 시골의 특성 파악과 지혜로운 대처 방안이 생기기 전의 시점이란 걸 알 수 있다.

근거 없는 소문 없고 오죽하면 소송까지 갔으랴 하겠지만 뒤집어보면 파국까지 치달은 이면에는 양보와 타협이란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결과다. 단지 사람과 짐을 옮기기 위한 자동차에도 속도를 내기 위한 것보다 멈추거나 줄이기 위한 도구가 배나 많은 것을 보면 피할 수 있을 때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알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마을과 지역에 잘 뿌리 내릴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주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이 충만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상대가 느끼거나 알아채기가 어렵다. 결국 보여준다는 건 그렇게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다.

#마을 고유의 전통을 존중하라

우리 동네는 일주일 이상 입원을 하면 마을에서 문병을 간다. 부녀 회원이 아프면 부녀회에서 가고 청년 회원이면 청년들이 나선다. 공동 행차인 만큼 승합차가 있는 이에게 기름값과 통행료를 걷어 주고 남은 돈은 환자에게 전달한다. 장기 입원이 많은 해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서로 어려움을 살피는 정겨운 품앗이다.

시골 살이를 꿈꾸는 이에게 드리는 조언은 이럴 때 가능한 한 빠지지 마시라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면 모를까 시골은 관계 중심의 사회라 내가 서운하게 한 만큼 그대로 돌려받게 되어 있다. 그러니 빚쟁이가 되지 말고 부지런히 다녀서 받을 것이 더 많은 채권자가 되는 것이 심간이 편해진다. 병원에 오가는 몇 시간은 평소에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들의 생활과 속내, 성정을 파악하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가족간에도 그렇지만 좁은 차 안에서 서로 물리적 거리를 없애고 이야기를 나눠야 시골 특유의 정이 흐르고 심리적 거리도 그만큼 더 가까워진다. 이때 사람을 웃기는 재능이 있다면, 시쳇말로 개인기도 뽐내고 운전에 능하다면 핸들을 잡아도 좋다. 어르신들은 술을 드시는 분들이 많기에 안전하게 병원까지 오간다면 다녀오기 전보다 여러분을 더욱 미덥고 살갑게 대할 것이다.

청년들의 농촌 행렬이 부쩍 늘었지만 적응은 별개의 문제다. 정부와 지자체가 좀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주어진 직책을 맡으면 정착에 도움

시골 동네에는 여러 직책이 있다. 보통 이장과 부녀회장, 노인회장, 상조회 회장인 청년회장 등이다. 청년회는 말이 청년회지 이십대에서 육십 초반까지 간극이 꽤 크다. 노인회는 인구가 적으면 별도로 구성하지 않고 옆마을과 통합되기도 한다. 여기에 마을과 지역 내 환경 정비를 담당하는 새마을 지도자와 살림을 책임지는 총무, 농협 대의원과 친목회장 격인 동계장이 있다. 동계는 대동계의 준말로 동계 회장은 대대로 마을의 영향력 있는 어르신이 맡는 게 관례다. 이장이 행정의 주무자라면 동계장은 친목과 단합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렇게 직책은 많지만 노령화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어떤 마을은 이장을 한 사람이 십년 넘게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자원의 순환만큼 인적 순환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아직 요원한 편이다.

글쓴이는 동네에 들어온 지 보름 만에 전폭적인 추천과 지지로 총무가 됐다. 직전에 옆마을에 살며 친분을 쌓았기 때문이다. 동네 총무가 머슴 같은 자리라 몇 년간 고생도 많았지만 안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공동의 일에 앞장서서 뛰는데 누군들 박수를 쳐주지 않을까.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감당할 수 있으면 맡으라 권한다. 동네 사람들의 이름이나 사는 모양새를 세세히 몰라도 한 번 더 묻고 발로 뛰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임자의 활동과 넘겨준 문건을 기초로 도시적인 세밀함과 감각을 더한다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처음에는 반장이나 총무로 시작해 이장으로 마을을 경영해보고, 끝으로 대동계의 수장이 되어 주민들의 화합을 이끈다면 오랫동안 꿈꿔온 오래된 미래를 마을 안에서 경험할 수 있으리라 본다.

글쓴이가 한 청년을 위해 만든 기획 광고.
#촌부의 질박한 여유를 누리고 싶다면…

시골은 소문이 매우 빠른 곳으로, 조금 과장하면 오늘 옆집 누군가에게 건넨 비밀이 일주일이면 마을 내 공공연한 비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어떤 이의 흉을 듣더라도 다른 이에게 옮기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험담은 내 귀에서 끝낼 수 있도록 스스로 단속하고 조심해야 한다.

특히 시골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풀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성과 합리라는 도시적 잣대는 정과 관계로 실타래처럼 꼬이고 얽힌 특유의 갈등을 풀어내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 따라서 귀농·귀촌인이 갈등의 중심에 놓이지 않으려면 늘 중용의 도를 잃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귀착지가 집성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시골로 향하는 도시민들의 바람은 넉넉한 자유와 함께 이웃과 갈등 없이 사는 것이겠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주변의 간섭과 관심이 너무나 크다. 좁은 생활 반경으로 인해 이웃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곳인 까닭이다. 때문에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골의 변함없는 가치는 프라이버시보다 공유와 나눔이다. 자유와 공유라는 두 가지 명제가 양립할 수 있을까. 이십년간 시골 살이를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관계 안에서 자유다. 동전의 다보탑과 숫자 십이 지극히 이질적이지만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농사도 그렇지만 수십여 가구에 불과한 동네속 삶이란 광고 카피처럼 대부분 예측가능하기에 주고받고의 법칙이 정확히 작동한다.

#시골은 먼저 돕는 이를 돕는다

하여 누군가를 도울 만한 여력이 있다면 주변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란다. 도움을 받으면 뼛속 깊이 새겨서 반드시 갚는 곳이 시골이다. 여든이 넘어서 일로 갚지 못하면 자녀가 왔을 때 식사 대접을 하거나 먹을거리로 고마움을 대신한다. 정히 갚을 기회가 없으면 하다못해 칭찬으로 주위의 시선을 따스하게 바꿔놓는다.

몇 년 전 돌아가신 경상도 아주머니나 한세월댁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려울 때 연대하지 않으면 시골에서 살아갈 다른 방법이 없음을 몸으로 겪으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든을 훌쩍 넘긴 휠체어 아주머니도 수시로 깐도라지, 대파 등 철철이 우리 집에 없는 것들만 골라 현관 앞에 갖다 놓으신다. 통계 조사 사례로 받은 오천원짜리 문화상품권도 당신은 쓸 일이 없다며 거절하는데도 끝까지 주고 가신다. 먼저 손을 내민다면, 우리 부부처럼 이웃의 거절할 수 없는 억지를 여러분도 경험할 수 있다. 홍성뿐 아니라 대한민국 시골 어디든 똑같다.

이환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