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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법조타운] 서울중앙지검에 입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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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5 01:04:15 수정 : 2017-04-11 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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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은 원래 공동묘지 동네 / 대통령 오는 일 더 이상 없기를 / 정치보복은 더 큰 보복 불러 / 절제하는 권력이 진정 값진 것 1989년 8월2일이 무슨 날인지 혹시 아세요. 서울 중구 덕수궁 부근에 있던 제가 한강 이남 서초구 서초동으로 이사를 온 날입니다. 그날 이후 서초동은 곧 검찰과 동의어가 되었죠. 제가 누구냐고요. 며칠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출석해 21시간 넘게 조사를 받은 곳, 바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입니다. 보통 ‘서울중앙지검’으로 줄여 부르죠.

사실 박 전 대통령은 저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친이 제 운명을 결정했거든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서초동 10만9000㎡(약 3만3000평) 부지에 법원·검찰청을 새로 지어 옮기는 계획을 발표한 것은 박정희정부 시절인 1977년 5월18일의 일입니다. 꼭 40년이 지나 박 전 대통령을 직접 대하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더군요. 물론 좋은 일로 오신 게 아니라서 가슴이 아프기도 했죠. 동이 튼 뒤에야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뒷모습에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습니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그동안 저는 대통령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건물이었습니다. 1989년 8월22일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라는 분이 공안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일이 있긴 해요. 당시는 야당 국회의원의 밀입북 사건에 관여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죠. 1997년 그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많이 부족한 편인가봐요.

1993년 1월15일엔 불과 1개월 전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출석했죠.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던 그분은 현관을 통과하다가 사진기자가 들고 있던 카메라에 그만 얼굴을 부딪치는 바람에 오른쪽 이마가 4㎝가량 찢어져 피를 흘리셨어요. 이를 계기로 거물급 인사는 소환에 앞서 포토라인을 설치하는 관행이 생겼죠.

반포대로로 불리는 찻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와 나란히 서있는 하얀 건물은 대검찰청입니다. 크다는 뜻의 ‘대’ 자가 들어간 청사답게 전직 대통령과 마주해도 전혀 떨지 않고 당당하더군요. 1995년 11월1일 도로 건너편이 왁자지껄 시끄럽다 했더니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나타났습니다. 뭐 수천억원대 통치자금 조성 혐의라고 하던데 말이 좋아 통치자금이지 실은 기업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거잖아요. 보름 뒤 그분이 구속될 때 무슨 대포처럼 펑펑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아직 뇌리에 생생하네요.

2009년 4월30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역시 대검 청사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청렴하고 도덕적인 분이라길래 제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퇴임 1년 만에 서초동으로 오셔서 참 의외다 싶었죠. 몰려든 수백명의 취재진과 시위대가 북새통을 이루는 광경을 보며 ‘역시 대검은 대검이구나’ 하고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쳤어요. 수사 도중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오늘날 강북에서 출발해 한강을 건너온 반포대로와 우면산 기슭 남부순환로가 만나는 지점, 그러니까 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왕촌(王村)’이란 마을이 있었대요. 고려의 왕손인 왕씨들이 망국 후 이 마을에 모여 살았답니다. 갓 개국한 조선이 왕씨들을 마구 탄압하자 태조 이성계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제발 내 후손한테 보복하지 마라”고 사정한 뒤 이성계의 특명으로 왕씨들을 위한 정착촌이 세워졌다고 하더군요.

그 왕씨들 무덤이 한 기 두 기 생겨나 나중에는 큰 묘지가 되었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법조계 1번지로 통하는 서초동 일대가 원래는 온통 공동묘지였던 셈이죠. 그래서일까요. 숱한 정치인, 고위관료, 대기업 총수 등이 저한테 왔다가 구속되는 것을 묘지의 과거사와 연관짓는 이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착잡하고 씁쓸할 따름이죠. 전직 국가원수마저 초췌한 모습으로 저희 동네에 오는 일은 이번을 끝으로 다신 없길 두 손 모아 간절히 빕니다.

저마다 ‘대세’니 ‘잠룡’이니 떠드는 대권주자들에겐 왕촌의 교훈을 꼭 들려주고 싶어요. 곧 새 정부가 들어설 텐데 ‘부역자’ 운운하며 지난 정권 사람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정치보복은 결국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권력이란 무소불위로 행사할 때가 아니라 절제하고 또 절제할 때 진정 값진 것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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