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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버무릴 때 들려온 지진 소식
묵묵히 대가족 먹일 김장 해냈던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 떠올라
힘겨운 삶, 이웃·가족과 이겨내야
11월도 중순에 접어들면서 마음이 바빠진다. 한 해를 허송세월했다 반성하며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보내야지 하고 다짐하던 때도 있었건만, 이즈음의 시간은 어찌 내 것이 아닌 듯 흘러가는지 학기 마감에 시상식이며 송년회 등 모임을 챙기고 돌아서면 청첩장이요, 확인하면 부고가 와 있곤 한다.

바쁘다고 빼먹을 수 있냐는 듯 턱 하니 다가오는 일, 김장이다. ‘까짓 사먹지 뭐’ 하면서도 배추를 보내오는 어머니, 천일염을 부쳐주는 시누이에, 올해도 유기농으로 지었다는 지인의 고추 판매 문자를 외면하지 못해 조금만, 서른 포기만 하자 결정하고 강의 사이사이 남편과 아들에게 문자를 보내 원격 조종하듯 배추를 절이고 몇 통의 전화로 생새우, 굴, 멸치액젓, 마늘, 파, 갓, 생강, 청각, 찹쌀 등을 주문했다.

서하진 경희대 교수·소설가
김장이 힘든 일인 까닭은 절이고 버무리고 갈무리하는 그게 전부가 아닌 탓이다. 가장 성가신 일, 일단 김치냉장고를 비워야 한다. 묵은 김치, 말린 우거지, 된장단지, 들깨·팥·콩이 한가득인 자루, 콩가루, 미숫가루, 양파즙 등 냄새나거나 부서지는, 버릴 수도 두기도 마땅찮은 온갖 먹거리들이 다용도실 바닥과 세탁기 위에 가득 차게 된다. 어찌어찌 그것들을 처리하고 묵은 찌꺼기를 닦아내고 나면 벌써 허리가 무지근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배추가 알맞게 절여졌다며, 역시 내 눈썰미가 대단하지 않냐는 남편의 생색에 속 넣다 말고 뻘건 고춧가루 묻은 엄지를 척 들어 보이는 한편, 휴대폰 들여다보느라 건성인 아들을 다독이고 김장엔 역시 보쌈이라는 주문에 삼겹살 정도는 구워 줘야 한다.

물론 허리 높이의 단지를 네댓 개 뒤란에 묻고 갈치, 낙지, 액젓 등 종류별로 속을 넣은 김치와 동치미, 여름철용 짠지까지 두 접이 넘는 김장을 하던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내 김장은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김장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의 일손을 빌리는 대신 푸짐한 점심을 장만했다. 뉘 집 아들과 딸을 엮고 어느 집의 경사와 흉사에 시샘과 염려를 나누는 오후가 지나고 돌아가는 길에 저마다 몇 포기씩 담긴 플라스틱 통을 든 아줌마들은 김치가 잘 익을 거라 덕담을 하고, 이 집 딸들은 살림꾼이네 하며 인사치레도 잊지 않았다.

준비하고 마칠 때까지 최소 일주일이었던 그 시절의 김장을 어머니가 힘들어했던 기억은 없다. 어머니는 신바람 난 듯 들떠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섯 남매에 할머니, 삼촌, 고모까지 10여 명이 훌쩍 넘는 대가족, 고향의 오촌이거나 외가의 조카였거나 항상 누군가 객식구가 있었던 시절, 돌이켜보면 식구 수만큼이나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던 그때의 어머니에게 김장은 오히려 휴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배추에만 집중해도 괜찮은 며칠간의.

얼추 마무리를 향해 갈 즈음 ‘탁탁’ 하고 탈수기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 뭐지 하는 순간 남편과 아들, 내 휴대폰이 동시에 삐익 긴급한 신호를 뱉어냈다. 긴급재난문자, 지진 소식이었다. 잠깐 멍해있다 포항의 조카, 친지의 안부를 묻는 톡을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남편은 뉴스를 확인하러 TV를 켜고 나와 아들아이는 남은 김장을 마저 끝냈다. 저물어 돌아온 막내가 ‘엄마, 대박 수능 연기됐대’ 한다. 재도전하는 친구들, 친구 동생들의 걱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막내, 포항과 경주의 친지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남편으로부터 들으며, 벽돌이 우르르 쏟아진 영상을 보며 나는 양념 묻은 대야를 씻고 남겨둔 배추로 된장국을 끓였다.

첫 독을 여는 날, 김치를 밥상에 올리며 어머니는 늘 다음해를 이야기하셨다. 내년에는 사골을 고아 넣어볼까, 보쌈김치를 좀 담가야겠다 등 그렇게 어머니는 일상의 힘겨움을 일상의 힘으로 이겨냈다. 지진의 기억과 함께 익어갈 올해 김장, 어떤 맛일지.

서하진 경희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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