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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타고 호수 건너 “편지 왔어요”… 따뜻한 마음 전하는 ‘사랑 배달부’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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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5-14 11:00:00 수정 : 2023-05-14 1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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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비수구미마을 집배원 김상준씨의 하루

평화의 댐이 위치한 강원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일대를 비수구미(秘水九美)라고 부른다. ‘신비한 물이 만드는 아홉 가지 아름다움’이라는 뜻의 이 마을은 1944년 화천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인공호수 파로호(破虜湖·옛이름 화천저수지)를 끼고 있다. 6·25전쟁 때 국군이 중공군을 격파해 오랑캐를 물리친 호수라는 의미의 이름을 갖게 된 파로호는 화천군과 양구군에 걸쳐 병풍 같은 높은 산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비수구미마을은 바로 산 아래의 이 호수변을 따라 있어 험한 육로보다는 뱃길로 접근이 쉬워 ‘육지 속의 섬 아닌 섬’으로 불리며 강원에서도 오지마을로 꼽히고 있다.

강원도 화천 평화의 댐 선착장에서 보트에 우편물을 싣고 김상준 집배원이 바람 거센 파로호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김상준(71)씨는 2002년부터 21년째 집배원 업무를 맡아 25가구, 동촌1리 10가구, 신내마을 5가구 총 40가구의 우편물을 책임진다. 김씨는 매일 아침 사륜구동 차량만 운행이 가능한 좁고 가파른 산길을 달려 읍내에 있는 우체국으로 출근해 하루를 시작한다.

당일 배달할 우편물과 택배 상자를 챙겨 평화의 댐 앞 선착장에서 보물 1호 보트인 ‘아침호’에 옮겨 싣고 파로호를 달려 각 가정에 전달한다. 그중 가장 거리가 멀고 길이 험해 배달이 어려운 지역인 비수구미마을은 호수 주변을 따라 집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 주로 수로를 이용해 배달한다. 험한 산길을 따라 차량으로 이동하면 5~6시간이 걸리지만 보트를 이용하면 3~4시간이면 가능하다.

매일 아침 강원도 화천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면서 김상준 집배원의 일과가 시작된다.
김상준 집배원이 선착장에서 택배 박스를 들고 보트에서 내리고 있다.
택배 박스를 든 김상준 집배원이 보트에서 내려 배달 가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 집은 사람이 없네요. 어디 가셨나?” 이런 질문에 김씨가 물안개가 자욱한 마을 한 선착장에 보트를 능숙하게 정박하며 말한다. “이 동네 주민들은 모두 개인 보트를 가지고 있어서 집 앞 선착장에 보트가 없으면 사람이 없는 거예요.” 외출한 주인을 대신해 강아지 두 마리가 뛰어나와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강원 평창군에서 태어나 9살 때 비수구미마을에 이사 온 김씨는 아버지와 화전을 일궈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민박과 산채정식 식당을 운영하면서 고추, 들깨 등 밭농사를 하며 동네 이장을 맡고 있다. 집배원 겸업은 21년째다. 집배원을 대신 맡을 적임자가 없어 정년이 한참 지난 나이에도 우편배달을 쉼 없이 하고 있다.

“몸은 힘들지만 방문하면 주민이 가족같이 반겨주고 늘 고맙다며 인사해 주니 힘이 나고 보람도 있어요. 이제 나이도 많고 팔이 아파서 배달 일을 더 오래하기 힘들 거 같은데 후임자가 마땅치 않아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마을에 이주해 12년째 거주 중인 지승공예가 나서환씨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고 있다.
김상준 집배원이 양춘자 할머니댁에 택배 박스를 받으러 들어서자 강아지가 몸에 안기며 반가워하고 있다.

김씨가 단순히 집배원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농사일에 바쁜 주민이 읍내로 나가기 힘들어 부탁하는 여러 민원과 대부분 고령인 주민 심부름도 외면하기 어려워 도움을 주고 있다. 단순히 우편물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함께 배달하고 있는 것이다.

길었던 하루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잠시 들른 황춘자(78)씨 집에서 읍내 지인에게 전달을 부탁한 두릅 박스를 받아 들고 보트에 오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김상준 집배원의 보트가 다음 배달 가정을 향해 파로호를 달리고 있다.

비수구미마을 ‘사랑의 배달부’ 김씨는 오늘도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주민을 만나러 아침호와 함께 물안개가 자욱한 파로호에서 물살을 일으키며 힘차게 질주하고 있다.


화천=글·사진 이제원 선임기자 jw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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