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만든 원인은 제거하지 못해
12·3 계엄사태도 점검 부실하면
민주주의 안전망 무너뜨릴 수도
1948년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 앞에 놓인 첫 시험대는 새로운 헌정 질서를 세우는 일보다 일제강점기 권력과 경제를 틀어쥐었던 친일 기득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그 물음에 응답하고자 출범한 것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였다. 반민특위는 친일 경찰과 정·관계를 겨냥했지만, 돌아온 것은 조직적인 방해와 물리적 폭력이었다. 이승만정부의 ‘국민 통합’과 ‘사회 혼란 방지’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탄압은 반민특위를 사실상 무력화했고, 친일 세력은 최소한의 책임조차 지지 않은 채 기득권을 공고히 했다. 그 대가로 한국 사회는 분단과 냉전,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번도 제대로 닫지 못한 ‘친일 청산’이라는 상처를 안은 채 여기까지 왔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1980년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은 권력에 대한 책임 추궁과 제도적 통제가 부재할 때 국가의 헌정 질서가 얼마나 손쉽게 전복되는지를 보여줬다. 두 쿠데타 권력은 스스로에게 유리한 예외 조항과 특권을 제도 속에 심어 넣으며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고, 시민의 자유와 국가 정체성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이후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충분한 처벌 없이 사면과 정치 복귀를 거듭했다. 상당수가 부와 영향력을 유지했고,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막강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통합을 이유로 이들을 단죄 못한 대가는 현재까지 사회적 불신과 세대·이념 갈등을 증폭시키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1년 전인 2024년 12월3일 대한민국은 또 한 번 비상계엄이라는 이름으로 헌정 질서의 근간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정부가 특검을 통해 내란 혐의를 받는 핵심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에 이어 수사망 밖에 있었던 공직자·군 장성·관료 전반의 역할과 책임을 들여다보는 ‘헌법존중 정부혁신 태스크포스(TF)’도 가동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총대를 멘 TF의 초점은 국가 권력이 스스로를 예외로 두지 못하도록, 계엄과 내란에 준하는 위기상황에서 어디까지가 합법적 지시이고 어디서부터가 헌법 위반인지 제도적 기준을 분명히 세우는 작업에 있다. 최근 육군 법무실장이 근신 취소와 함께 장군에서 대령으로 강등된 사례는 “이번만 넘기자”는 관행을 끊겠다는 신호다.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도 예외일 수 없다. 지귀연 판사가 내린 윤석열 전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은 계엄 시도라는 사안의 중대성과 사회적 파장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반영했느냐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 등 12·3 비상계엄 당시 국무위원들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역시 법원이 내란 혐의의 실체와 위험성에 대한 실질 심사라기보다는 사건을 정치적 해프닝 수준으로 축소해 버린 인상을 준다. 겨울밤 아스팔트 위에서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계엄 선포를 막고 있던 순간, 아무런 입장조차 내지 않은 사법부다. 사법부는 그저 법전의 조항과 법정의 서류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삼권분립을 내세우면서 현실적 책임을 외면하는 판결이 반복될 경우 사법부는 민주주의의 안전장치가 아니라 책임 회피의 최후 피난처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역사는 반복해서 같은 경고를 보내왔다. 친일 청산과 쿠데타 책임 추궁도 출발선엔 늘 “책임을 묻자”는 요구가 있었지만, “통합을 위해 묻고 가자”는 논리가 우선순위가 되면서 처벌과 제도 점검은 지연되거나 생략됐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다음 세대가 떠안았다.
같은 장면이 12·3 비상계엄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통합을 우선하라’, ‘줄세우기를 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통합은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는 것일 뿐 상처를 만든 원인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원인을 남겨둔 채 봉합만 하면 붕대 안에서 균이 번지고 더 큰 괴사가 올 뿐이다. 12·3 계엄 관련 수사와 제도 점검이 부실하면 생기는 것은 안정이 아니다. 책임의 진공이다.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은 구태 기득권이다. 현대사는 책임 없는 통합이 민주주의를 허물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증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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