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심호섭의전쟁이야기] 서울을 지킨 ‘골든 라인’

입력 :

인쇄 메일 url 공유 - +

1951년 4월, 중공군 5차 공세가 시작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상실의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서울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달랐다. 그는 서울이 또다시 함락될 경우 국군과 한국인들이 받을 심리적 충격과 사기 저하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의 ‘골든 라인(Golden Line)’을 사수하며 서울을 지켜냈다.

특히 골든 라인의 오른쪽 끝에 위치한 불암산과 태릉 일대는 6·25전쟁 당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싸웠던 장소이자, 국가 수호라는 국군 장교단의 정체성이 형성된 공간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수립 기금 조성 포스터
육군사관학교 수립 기금 조성 포스터

1950년 6월 전쟁 발발 당시 육사에는 임관을 앞둔 생도 1기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생도 2기가 재학 중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생도들은 서울 방어를 위해 전장에 투입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생도들을 소총수로 전투에 투입한 것은 분명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국가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 생도들이 직접 전장에 나섰다는 점에서, 이후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을 형성한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

사실 전쟁 이전의 육사는 건군 초기의 과도기적 장교 양성기관에 가까웠다. 1949년에서 1950년 무렵 육사는 4년제 정규 사관학교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 전쟁이 발발했고, 육사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으며 태릉 교정은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이후 육사는 1951년 말에 진해에서 재개교했다. 하지만 진해는 어디까지나 전시 상황 속 임시 교정이었다. 이후 정부가 태릉 복귀를 추진한 이유는, 이곳이 국군 최초 부대인 1연대의 탄생지이자 조선경비사관학교와 육사가 자리했던 국군의 발상지였으며, 6·25전쟁 당시 서울을 사수했던 방어선과 연결된 역사적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밴 플리트였다. 그는 육사의 태릉 복귀와 재건을 위해 모금 운동까지 주도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또한 1955년 화랑대로 복귀한 최초의 4년제 졸업생인 육사 11기 졸업 및 임관식 연설에서 태릉 일대를 서울 방어의 ‘골든 라인’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육사 부지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보았지만, 결국 다시 태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골든 라인’이 장차 대한민국이 통일로 나아갈 “황금과 같은 기회(Golden Opportunity)”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현재 육사의 위치는 서울 방어와 더 나아가 통일 한국의 미래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였다.

태릉과 화랑대는 생도들이 직접 싸웠던 전장이었고, 서울을 방어했던 최전선이었으며, 전후 국가 수호라는 국군의 정체성을 담은 육사가 재탄생한 곳이었다. 이곳은 국군과 육사의 역사와 정신이 새겨진 상징적 공간이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오피니언

포토

이영애, 뉴욕 거리서 포착
  • 이영애, 뉴욕 거리서 포착
  • 초아, 금발 벗고 분위기 변신
  • 임지연, 청순 분위기
  • 이민정, 이병헌도 반할 드레스 자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