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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의쉼표]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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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5-26 22:47:50 수정 : 2023-05-26 22: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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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에 출간했던 장편소설을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하고 싶다는 출판사의 연락을 받았다. 내가 기꺼이 동의하자 출판사에서는 조판 전에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달라며 초판 원고 파일을 보내왔다. 그것이 작년 가을의 일이다. 담당 편집자는 내년 봄에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 아직 몇 달의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살펴봐달라고 했다.

가을에서 겨울 사이, 나는 일없이 바쁘기도 했고 쓸데없이 아프기도 해서 원고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출간된 소설이니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내용을 뜯어고칠 수도 없고, 또 내용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면 딱히 수정할 부분이 뭐 그리 많겠는가 생각한 탓도 있다.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올해 1월, 편집자가 이제 곧 편집을 시작하려 한다며 원고에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본격적으로 원고를 들여다보면 이삼일 안에 끝나리라는 계산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 이삼일은 일주일이 되고 열흘이 되고 보름이 되었다. 내가 게을러서도 바빠서도 아니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심각해서였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나 사고방식에 심각한 오류가 적잖이 있었던 것이다. 까마득한 15년 전에 쓴 소설이라고 해도 당시 나의 성 인지 감수성이, 특히 성 역할에 대한 관념이 그렇게나 삐뚤어져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고, 그런 사유나 표현들이 아무 문제도 안 되었을 시기라고 나를 위로하는 편집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참담했다. 여자들은 취직 못 하면 시집이라도 갈 수 있으니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남성, 남자들은 하나같이 어리고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며 자신의 외모를 비관하는 여성,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한없이 납작하면서도 폭력적인 대사들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것들을 전부 하나하나 수정했다. 수정하면서도 여러 번 좌절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문장 표현을 몇 군데 고치는 것으로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수는 없음을 시시각각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초판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의 관계를 왜곡하지도 않으면서 표현만 다듬는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었다. 전부 지우고 완전히 새로 쓰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나와 타협했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던 누군가의 말이 새삼 뼈아프게 떠오른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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