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 ‘미국 대선의 풍향계’로 불리는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 노샘프턴을 방문했을 때 만난 친절한 백인 아줌마 란다는 당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사이에 갈등하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정착한 노샘프턴에 40년간 산 그는 2016년 대선에서도, 2020년 대선에서도 트럼프 당선인을 뽑았다. 하지만 이번엔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당선인의 인간성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 대통령이 나오면 좋겠지만, 미국이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점이 걱정이라고 했다. 여성인 해리스 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같은 독재자에 맞서서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보다는 해리스 부통령이 첫 여성 대통령으로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잘난 체하는 힐러리’보다 호감형이란다. 란다는 결국 해리스 부통령을 뽑았을까. 아닐 것 같다.
5일(현지시간)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인의 압승은 인플레이션과 이민 문제 때문이다. 나빠진 주머니 사정과 내 삶의 반경을 위협하는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미국 사회에 매우 높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해리스 부통령이 이길 수 있다면, 원인은 여성표의 결집이 될 것이라는 분석 혹은 기대가 많았다. 연방 차원에서 재생산권(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트럼프 당선인이 1기에 임명한 대법관들에 의해 폐기됐고, 민주당은 분노한 여성들의 표가 트럼프 당선인에게서 이탈하기를 기대했다. 실제 이를 기대해볼 만큼 최근 미국에선 전국적으로 낙태권 관련 집회가 많았다. 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목소리 출연한 광고에서 한 백인 여성은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하고 나와 트럼프 당선인 지지자로 보이는 남편이 “당신, 옳은 선택을 했지?”라고 하자 “그럼, 여보”라고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민주당은 이렇게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해달라고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성표는 결집하지 않았다. 민주당이 정말 여성표에 온 승부를 다 걸 생각이었다면 오히려 순진했다는 생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선거 직전 백인 여성들에겐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대한 열망보다는 불법 이민자들의 범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측이 들어맞았다.
공화당 유세에 가보면 평범한 여성들이 범죄 문제, 경제 문제 등 저마다의 이유로 트럼프 당선인을 지지한다. 트럼프 당선인에게 투표하는 여성들은 아주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이 여성의 권리보다 다른 문제를 더 우선하도록 만들었다고 해서 그들을 절대 폄하해선 안 된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클린턴 전 장관은 2016년 정계 은퇴 연설을 겸하는 승복 연설에서 “젊은 여성, 당신들의 챔피언이었던 것이 무엇보다 자랑스럽다”며 “언젠가 유리천장은 깨진다”고 말했다. 반면 해리스 부통령은 모교 하워드대에서 6일 가진 승복 연설에서 자신의 인종이나 성별과 관련된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의 이 같은 태도를 보고 오히려 해리스 부통령이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상대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한정 짓는 빌미를 주지 않은 셈이다. 그는 오직 “싸움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을 뿐이다.
NYT는 해리스 부통령이 진 뒤 “여자가 언젠간 대통령이 될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실의에 빠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NYT와 인터뷰한 한 여성은 “국민의 51%가 편협하고 여성 혐오적인 사람에게 투표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말했다. NYT는 어머니들이 딸들이 희망을 잃게 될까 봐 위로하고 있다고 전했다. 2016년 클린턴 전 장관이 패배하던 날,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 여성 대통령의 탄핵 관련 기사를 쓰며 안타까웠던 기억이 스쳤다.
20세기 초 영국 여성 노동자들의 참정권 투쟁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영화는 결국 참정권을 얻어내지 못한 채로 끝난다. 남성과 동등한 여성 참정권은 미국에선 1920년, 영국에선 1928년이 시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약 100년 전의 일이다. 싸움에는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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