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헌법 제정을 주도한 조지 워싱턴을 만나 왜 상원을 만들기로 했는지 물었다. 워싱턴은 제퍼슨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째서 커피를 접시에 받쳐 마시는 거요.” 제퍼슨은 “그야 커피가 뜨거우니까 식혀 마시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우리도 의회의 열을 식히려고 상원이라는 접시를 만든 겁니다.” 워싱턴의 답이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은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따라 양원제를 만들었다. 실제 미국에서 대통령 탄핵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상·하원으로 권한을 나눈 시스템의 역할이 크다. 탄핵 소추는 하원, 탄핵 심판은 상원에서 하는데 상원 3분의2 이상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하원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몇차례 통과시켰지만 상원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헌정사상 두번째로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 파면되면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 40여일후면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다. 새 리더십에 대한 희망 보다는 ‘고장난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지금 이대로라면 누가 차기 대통령이 돼도 비슷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겪고 상대 진영을 적대시하는 풍토가 굳어질 것이라는 우려다. 본지는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선고 이후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시리즈(4월7일 ‘내우외환 위기, 통합의 미래를 열자’, 4월8일 ‘승자독식 구조 탓 민심 왜곡, 소선거구제가 갈등의 뿌리’, 4월9일 ‘바람잘 날 없는 헌정 버팀목’, 4월10일 ‘협치·존중 바탕 통합시대 열어야’·편집국 종합)를 통해 이번 대선의 시대 정신을 짚었다.

◆어떻게 ‘통합’을 이룰 것인가
각 분야별로 취합한 전문가 20인의 의견은 ‘통합’으로 모아졌다. 윤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드러난 국론 분열의 양상이 심각했던 만큼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타협·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문제는 사람이 바뀐다고 통합의 리더십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 전문가들이 현행 5년 단임의 대통령제 자체를 바꿔야한다거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제도를 바꿔야한다고 주문하는 이유다.
1987년 개헌 이후 5년마다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대부분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8명의 대통령 가운데 4명(노태우·이명박·박근혜·윤석열)이 구속됐고 3명의 대통령(노무현·박근혜·윤석열)이 탄핵 소추됐으며 그 중 두 명이 파면됐다. 구속을 피한 대통령들도 자신의 가족이 권력형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걸 지켜봐야했다. 한 사람은 그 과정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치권 인사, 전문가들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라고 한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본지 인터뷰에서 “개헌을 통해 대통령 권한을 줄여야한다”며 “대통령은 통일·외교·국방을 맡고 경제·사회·문화 등 내치는 국무총리가 맡도록 하되 총리 선출권을 국회에 줄 수 있을 것이다. 총리에게는 국회 해산권을 주면 서로 견제할 수 있다”고 했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도 “비극적인 사태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개헌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지 워싱턴의 말처럼 ‘열을 식힐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 표라도 더 얻으면 권력을 독점하는 선거제도를 바꿔야한다는 의견도 많다. 김윤태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의 제일 구조적인 요인은 대통령제의 권력구조나 소선구제로 불리는 단순다수대표제와 같은 선거제도로 인한 정치 양극화”라고 지적했다. 한 선거구당 2∼4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면 다양한 정당이 국회에 진입해 지금과 같은 거대 양당의 적대적 정치를 완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관용·절제의 정치 문화 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인 2008년 12월 고향 봉하마을에서 한 학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가 영문 학술지에 공개한 인터뷰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세 가지 요소로 정의했다. “권력층이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첫 번째 요소다. 그것이 법의 지배다. 시민들이 권력을 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권력이 스스로를 절제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는 권력의 자기 절제라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 문화가 민주주의의 (두 번째) 핵심 요소다. 그리고 (세 번째 요소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이 진전되고 그것이 그 결과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나는 권력의 절제와 법치주의, 그것이 문화로서 정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가 요즘 보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얼마나 (내 임기중) 진전을 이뤘는지 회의가 든다”고 했다.
헌재도 윤 전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면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강조했다. 본지가 의견을 들은 전문가들도 광장의 분열을 막을 수 있는 건 여의도 정치의 회복, 정상화라고 봤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조기 대선에서 대타협선언이 필요하다”면서 “양대 정당이 서로 어깃장 놓고 발목 잡는 정치는 이제 그만하고 협치를 통해 경제위기를 풀어나가고 제도를 고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주문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학과 교수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국민이 뽑은 국회가 충돌하면 해법은 리더십과 정치력, 자제력밖에 없다”고 했다.

12·3 계엄 사태와 윤 전 대통령 탄핵·파면은 극단적인 한국 정치의 현실을 보여줬다. 17년 전 노 전 대통령이 “하나도 이뤄지지않았다”고 했던 ‘권력의 절제,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여전히 실종 상태다. 40여일 후 새 리더십은 권력의 절제, 상대에 대한 관용, 타협의 정치를 보여줄 수 있을까. 선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도 권력을 잡으면 공감력이 떨어지고 권력을 남용하는 ‘권력의 패러독스’에 빠진다고 한다.(미국 UC 버클리대 대커 켈트너, ‘권력의 패러독스’) 권력자가 스스로 절제하지못한다면 결국 ‘주권자’인 국민이 맹렬하게 감시·견제하는 수밖에 없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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