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 강수에 상류 하천은
가는 물줄기 사라지고 급류 '콸콸'
"이 비는 금비에요, 황금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쨍쨍한 햇볕만 내리쬐던 강릉에 굵은 빗줄기가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진 13일 오전 강릉시민들의 '물그릇'인 강릉 성산면 오봉저수지에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강릉지역의 생활용수 87%를 공급하고 있는 오봉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찼는지 궁금해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운반급수 작업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통행할 수 없었지만, 호우 덕에 오늘은 하루 쉬어가면서 통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궁금증에 못 이겨 저수지를 찾은 사천면 주민 임정호(68)씨는 "이제 좀 살 것 같다"며 "이 비는 '황금비'고, 그다음에 오는 비는 '은비'"라고 반색했다.
임씨는 "동네 사람들한테 알려야 해요. 운반급수에 쓰이는 호스까지 다 찍었어요. 주민들이 물을 진짜 절약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하잖아요"라며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저수지 모습을 사진첩에 한가득 담았다.

하루에도 날씨 정보를 수십번은 본다는 임씨의 말 따라 그의 휴대전화 포털 앱 검색 목록 최상단에는 '강릉 날씨'가 기록돼있었다.
또 다른 주민 최호순(54)씨도 "엊저녁부터 빗줄기가 굵어져서 밤새도록 지켜봤는데, 과연 오봉댐에 물이 얼마나 찾을까 궁금해 찾게 됐다"며 "이 정도 비라도 내리는 게 강릉시민 입장에선 굉장히 좋다"고 반색했다.
직업이 경찰관이라고 밝힌 최씨는 오봉저수지로 물이 유입되는 왕산천과 도마천을 가리키며 "조금만 더 오면 가뭄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공무원 등이 조금이나마 수고를 덜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최씨는 "샤워나 빨래할 때 너무 힘들었는데, 어려운 시기를 겪다 보니 비가 오기만을 정말 오래 기다렸다"며 "내일 오전까지 비가 온다는데 빗줄기가 더 굵어져서 큰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강릉 토박이 함돈석(55)씨도 "댐이 생기기 전부터 자주 다녔는데 이렇게 마르긴 처음"이라며 "조금이나마 해갈이 될 것 같고, 이 비가 계속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부터 오봉저수지에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부터 비 소식에 일부러 찾은 사람들, 근처를 지나가다가 일부러 들른 외지인까지, 저수지를 찾은 이유는 같은 듯 달랐지만, 가뭄이 해갈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만큼은 모두 같았다.
오대산에 등산하러 왔다가 호우로 인한 탐방로 통제에 오봉저수지로 발길을 돌렸다는 강릉 출신 황길수(55·서울)씨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물이 많이 고여있는 것 같아서 안심된다"고 안도했다.

강릉에는 전날 오후 4시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강릉 연곡면·성산면·왕산면이 포함된 중부 산지에는 이날 새벽 3시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데 이어 3시 50분에는 강릉 평지에도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호우특보는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해제됐다.
강원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전날부터 이날 오전 9시까지 오봉저수지 영향권에 드는 곳에 내린 비의 양은 닭목재 80.5㎜, 왕산 74㎜, 도마 70.5㎜를 기록했다.
실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만 흘렀던 오봉댐 상류 도마천과 왕산천은 모처럼 거센 물줄기가 요동쳤다.
돌부리에 부딪힌 물살이 포효하듯 골짜기를 채우고, 숨 가쁘게 쏟아지는 물이 서로를 밀쳐내며 내는 '쏴아아', '콸콸콸' 소리가 답답했던 가슴을 뻥 뚫었다.

쿵쿵 부딪히며 내달리는 급류와 그 소리에 차량 창문을 열고 동영상을 찍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내리막만 걷던 오봉저수지 저수율도 오름세로 돌아섰다. 전날 11.5%까지 떨어졌던 저수율은 이날 오후 2시 기준 13.4%까지 올랐다.
지난 7월 21일 저수율 36.3%에서 7월 22일 36.6%로 오른 뒤 53일 만의 상승이다.
이에 강릉시는 이날 시청에서 회의를 열고 저수조 100t 이상 보유 아파트의 제한 급수를 오전 6시부터 9시,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하루 2차례, 각 3시간씩 통일해 시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지난 7월 6일부터 시작된 가뭄의 여파가 이번 비로 해소되진 않겠지만, 무기한 제한 급수 조치로 빨래나 샤워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고 계신 강릉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의 말 따라 이번 한 번의 비로 가뭄을 완전히 해갈할 수 없는 만큼, 하늘에 아쉬워하고 앞으로의 날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이날 송정동 하평뜰에서 만난 농민 김동창(69)씨는 "대파 농사는 이미 망쳤고, 배추밭이라도 잘 됐으면 하는 마음뿐"이라며 가뭄으로 지친 마음을 달랬다.
운반급수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소방 관계자들도 마음 편히 쉬지 않고 오봉댐으로 나왔다.
이상현 강릉소방서장과 함께 오봉댐을 찾은 이진호(67) 강릉재향소방동우회장은 "비가 내리곤 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다"며 "비가 진작에 확 쏟아지고, 지금보다 더 많이 와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강릉 출신 시인 장인수씨는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가뭄의 언덕을 넘어'라는 시를 써서 기자에게 보내왔다.
'빨간 하늘 아래 숨쉬기조차 힘든 하루 / 가뭄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불 보다 더 뜨겁게 태우고 / 태풍 오기를 기다리는 어이없는 생각의 굶주림은 이상할 것도 없어라 / 가뭄의 언덕에 올라 긴 하루에 점 하나 찍고 하늘 향해 일갈해 보지만 허공은 그저 뜨거울 뿐 / 백팔년 만의 가뭄 눈물샘조차 마른 것인가 / 악어의 눈물이라도 훔쳐 메마른 저수지에 흘려보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으면 백팔번뇌 씻어 줄 반가운 비가 내리지 않을까'
기상청은 오는 17일에도 강릉지역에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한다. 타들어 가는 속을 시원하게 달래줄 비가 또 한바탕 쏟아지기를 강릉시민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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