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에 자리한 오목대에서 ‘후백제 성터 추정지’ 일부가 발견됐다. 성벽은 흙과 돌이 뒤섞여서 쌓인 구조로 나타나 견훤과 주변 지방세력이 쉼 없이 패권 다툼을 벌이던 시대의 공기가 읽혔다. 출토된 기와 양식은 전남 순천 해룡산성 등 후백제 산성으로 알려진 곳에서 발굴된 유물과 유사했다. 현장을 찾은 학자들은 ‘후백제의 성이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한 노학자가 말했다. “후백제의 성이라는 확증을 얻자고 지금의 전주를 뒤엎을 순 없지 않나.”
문화재와 도시는 늘 이런 질문에 직면한다. 서울 세운 4구역 일대 재개발과 종묘 경관 보호를 둘러싼 갈등도 다르지 않다. 양측 사이의 접점을 찾는 일은 20년째 풀리지 않은 숙제다. 종묘는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세계유산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역사 유물이 대거 사라진 현실에서 반드시 보존해야 할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 한국 사회는 문화재 보존에 무게를 두곤 했다.
그러나 도심의 시간을 무한정 멈출 수는 없다. 1968년 준공된 세운상가는 한국형 주상복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후화가 심각하다. 서울시에 따르면 세운지구에 밀집한 1118개 건물 중 9개(0.8%)를 제외하면 모두 20년 이상 된 노후 건축물이다. 낙하물·화재 위험과 좁은 도로 등 안전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됐다. 2023년 9월에는 세운상가 7층 외벽 일부가 떨어지면서 상인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주민과 상인에게 재개발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 됐다.
가장 불편한 지점은 정부와 정치권이 유발하는 정쟁이다. 대법원이 ‘문화유산 보호 구역 밖에서 하는 공사까지 제한할 수 없다’는 판결을 한 이후에도 김민석 국무총리와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강경한 메시지로 재개발에 제동을 걸면서, 논쟁은 ‘문화재 보호’라는 외피를 쓴 정치적 힘겨루기로 번졌다.
‘높이’를 둘러싼 갈등도 존재한다. 그러나 특정 시장과 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이명박정부 시기부터 이어진 난제다. 사업이 지체되는 동안 세운상가 일대에 들어설 빌딩의 ‘최고 높이 기준’은 70m에서 145m까지 오르내렸다. 원칙 없는 줄다리기 속에서 도시계획은 표류했고, 그 대가는 현장에서 버티는 주민과 상인이 떠안고 있다.
서울시도 이 혼선을 키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조화로운 해법’을 말하지만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유산영향평가(HIA)를 받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영향평가에 길게는 4∼5년이 걸리고 개발 비용이 늘 수 있다는 이유다. 하지만 절차를 건너뛴 속도전은 되레 리스크를 키운다. 라자르 일룬드 아소모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장은 지난달 25일 허 청장과 면담에서 종묘 앞 재개발 사업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고 HIA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대규모 개발사업을 이유로 독일 드레스덴의 엘베계곡, 영국 리버풀 해양상업도시가 세계유산 지위를 잃은 전례를 떠올리면 아소모 센터장의 권고를 가볍게 치부하기 어렵다. 절차를 무시한 자신감은 행정이 아니라 도박에 가깝다.
정쟁이 길어질수록 피해를 보는 쪽은 주민이다. 이제 과제는 단순하다. 보존이냐 개발이냐가 아니다. 도시의 회복과 유산의 품격을 동시에 지킬 ‘절차와 기준’을 확정하는 일이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이계(二季)](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07/128/20251207508944.jpg
)
![[특파원리포트] 워싱턴 총격사건으로 본 美 현주소](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07/128/20251207508940.jpg
)
![[박영준 칼럼] 中·日 관계 경색과 한국 외교의 과제](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07/128/20251207508910.jpg
)
![[김정기의호모커뮤니쿠스] “정부에 위험스러운 존재”](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07/128/20251207508925.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