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구속영장 발부되던 날
SNS서 뭉쳐 법원으로 몰려가
‘전과 1범’ 꼬리표 붙이고도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 항변
옥색 수용복을 입은 여자가 2평 남짓한 접견실에 앉아 있었다.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구치소에서 만난 윤세민(37)씨다. 염색한 머리 뿌리가 3㎝쯤 검게 자라 있었다. 거칠어진 입술엔 하얀 각질이 일었다. 10개월 구금 생활의 흔적이다.
접견 시간은 10분뿐. 두 겹 칸막이 유리 너머 윤씨가 입을 열었다.
“1심 판결이 너무 억울해요. 애국심 하나로 그 추운 겨울 길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윤씨가 눈을 부릅 떴다.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눈물이 두 뺨 사이로 흘렀다.
지난해 1월19일 새벽, 윤씨는 서울서부지법에 있었다.
시위대가 깨트린 법원 유리창을 넘어 영장전담 판사실이 있는 7층까지 올라갔고, 복도에서 판사 이름을 외쳤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서부지법 난동 사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 폭도라고도 불렸다.
그날 시위대가 던진 벽돌과 유리병에 맞은 경찰 51명이 다쳤다. 영장담당 행정관과 법정보안팀장, 부상당한 경찰 한 명은 숙직실에 고립됐다. 법원 외벽이 무너져 내리고, 출입문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피해액만 4억7000만원에 달했다. 지난달 1일 기준 특수건조물침입 등 혐의로 141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극우 폭도’로 불린 이들은 누굴까.
지난해 3월 첫 공판부터 12월 2심 선고까지 이 사건 재판 68건을 방청하며 피고인 26명을 만났다. 구치소 접견실을 오가며 8명을 만났고, 8통의 손편지를 받았다. 법원 담장을 넘은 피고인 절반 이상이 30대 이하였다. 꿈을 위해 공부하고, 일하며 돈을 모으고,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는 나이에 전과자가 된 것이다.
피고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군중심리에 휩쓸렸다.” “극우가 아니다.”
동시에 이렇게도 말했다. “저항권 행사였다.”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행동이었다.”
1년이 지났다. 법원을 습격한 이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 비뚤어진 ‘애국’은 계속되고 있었다.
◆서른일곱 전과 1범, ‘애국’이라 믿은 선택
“저는 익명 아니어도 됩니다.”
접견실에서 윤씨를 만나고 며칠 뒤 구치소에서 이런 편지가 왔다. 줄도 칸도 없는 흰 종이 위로 정갈한 글씨가 아홉 장을 빼곡히 메웠다. 서른일곱살에 범죄자가 된 한 여자의 삶이 거기 눌러 적혀 있었다.
윤씨는 부산이 고향이다. 열아홉 되던 해,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 무너졌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윤씨에게 남은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유학을 꿈꿨지만 기댈 곳이 없었다. 호주로 건너가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영국 유학을 갔다. 낮에는 수업 듣고 밤에는 민박집에서 일했다. 서른이 넘어서야 숨 돌릴 틈이 생겼다. “환경을 탓하는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갔습니다.”
‘노력에 보상받고, 상식에 부합하는 나라’에 살고 싶었다. 윤씨는 586 운동권 세대가 싫었다. “선민의식이 역겹다”고 했다.
그러던 중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낼 것’이라는 대통령 담화문을 봤다. 거대 야당의 횡포로 나라꼴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그걸 막으려 한다고 믿었다. 관저가 있는 한남동, 헌법재판소, 집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아스팔트 위 커뮤니티에서 믿음은 굳건해졌다.
지난해 1월18일 어김없이 서부지법 앞에서 ‘탄핵반대’를 외쳤다. 다음 날 일정으로 귀가 후 몇 시간 뒤 윤씨 카카오톡이 불날 듯 울렸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가 임박했다는 소식이었다. “잠깐이라도 역사적 현장을 보고 오자는” 생각에 집을 나서 10㎞ 떨어진 서부지법으로 향했다.
1심 재판부는 윤씨의 행위를 무겁게 봤다.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깨진 유리창을 넘어 선제적으로 건물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윤씨를 따라 들어오면서 1층 현관문이 열렸다. 재판부는 이를 ‘적극적인 의사에 기반한 침입’이라고 판단했다. 7층까지 올라가 법관 이름을 외치며 고성을 지른 점도 지적됐다. 평온을 침해한 정도가 상당히 컸다고 봤다. 검찰은 1년6개월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1년10개월을 선고했다.
윤씨는 여전히 “애국심 하나로 한 일”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윤씨 측은 양형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새해부터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도 말했다.
윤씨는 2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4개월 감형됐다. 11개월 넘게 구금된 점, 공탁금을 낸 점이 참작됐다. 윤씨는 상고하지 않았다. 새해 첫날, 형이 확정됐다. 윤씨는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구속될 걸 알고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겁니다.” 서른일곱 범죄자는 여전히 애국을 말했다.
◆집콕 게임광, ‘디시’에 홀려 법원으로
김태영(31)씨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법원 안에 함께 들어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지난해 11월14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김씨를 처음 만났다. 얇은 금속 안경테 너머로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찬바람이 부는 초겨울 날씨에도 회색 양말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1년 전 김씨도 서부지법에 있었다. 윤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7시간 전, 법원을 빠져나가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차 뒤에서 다른 시위대와 팔짱을 끼고 섰다.
1심 재판부는 김씨에 특수공무집행방해와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공무원의 신체 안전까지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현장에서 체포돼 다른 피고인들과 함께 구속됐다. 구치소에선 눈칫밥을 먹었다. 수용자들 사이에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5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무직인 김씨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광주의 작은 방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밥을 거르고 잠을 안 자도 화면에선 눈을 뗄 수 없었다. “뇌가 게임 말고 다른 것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대학에 가지 않았다. 성인이 됐지만 똑같은 삶이었다. 그러다 게임 말고 다른 것에 흥미가 생겼다.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화면 속 글들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는 조작됐고, 언론은 거짓말을 했다.” 김씨는 그 말을 믿었다. 스스로 “세뇌됐다”고 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뒤 커뮤니티는 들끓었다. 지난해 1월16일, 즐겨 찾던 디시인사이드 미국정치 갤러리에 글이 쏟아졌다. “이대로 놔두면 끝난다. 윤석열이 암살당한다. 지금 서부지법에 가지 않으면 다 죽는다.”
김씨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방을 나왔다. “어디서 그런 행동력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돈이 없어 전부였던 게임 머니를 팔았다. 20만원을 들고 광주송정역에서 서울행 KTX에 올랐다. 45년 전 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도시를 떠나,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지키러 가는 길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여관에서 이틀 묵었다. 1월18일 오후 2시쯤 서부지법 앞으로 갔다. 법원 담장을 넘으려 했지만 주변 시민들이 말렸다. 발길을 돌려 서울지하철 6호선 공덕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공수처 차량이 보였다. 김씨는 스크럼을 짜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날 오후 7시쯤 체포됐다.
김씨는 후회하느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커뮤니티를 믿은 건 틀렸을지 몰라도 법원에 간 행동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미안하죠. 저만 법원 밖에 있었던 게. 함께 법원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지난해 성탄절 전날, 2심 재판부는 김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양형이 부당하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정을 나온 김씨는 한 달 전과 부쩍 달라 보였다. 볼이 푹 꺼지고 손가락이 앙상했다. 선고를 앞두고 금식 기도를 한 탓이었다. 170㎝에 50㎏이 채 안 돼 보였다.
가방에 태극기 깃발을 꽂은 할머니가 김씨에게 다가왔다. 확성기를 들고 ‘멸공’ 배지를 단 젊은 여성과 함께였다. “판사들 썩었지, 판사들 썩었지.” 할머니가 김씨 등을 토닥였다.
김씨는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행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윽고 할머니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대통령님 재판 보러 가야 해. 자유대한민국….” 그는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공판장으로 향했다. 김씨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난달 12일 기준 1심 재판이 끝난 피고인은 106명이다. 이 중 67.9%(72명)는 형이 무겁다는 이유 등으로 항소했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피고인 10명 중 7명(73.6%) 뒤엔 특정 협회 소속 변호사들이 있었다. 공소 사실을 부인하라고 했고, ‘아직도 사법부를 믿느냐’며 불신을 부추겼다.
취재=윤준호·이예림·소진영 기자
사진=남정탁·최상수 기자
편집=서혜진·도진희 기자
그래픽=권기현·손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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