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위해 학교 세우고 의료봉사까지
“캄보디아에는 아픈 사람이 정말 많아요”
열네 살 소녀의 꿈은 의사였다. 아픈 사람을 고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은 소녀를 교실이 아니라 감자밭으로 보냈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그만둔 소녀는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나갔다. 손톱의 풀물이 빠질 날이 없었다.
소녀는 결심했다. 나 하나 희생하면 가족이 산다고. 2010년, 스무 살의 소녀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인쇄업을 하던 남편 김만식 씨의 따뜻한 눈빛을 본 순간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충북 청주에서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스롱 피아비(36). 지금 그 이름 앞엔 ‘당구 여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남편이 쥐여준 큐대, 진짜 무기는 독기였다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은 외로웠다. 그런 아내에게 남편이 쥐여준 건 뜻밖에도 당구 큐대였다. 2011년 여름, 남편을 따라 우연히 들른 당구장에서 그녀는 처음 공을 쳤다. 기본 원리를 한 번 듣고 곧바로 이해할 만큼 눈썰미가 좋았다. 아내의 천재성을 알아챈 남편은 살림을 도맡으며 사방으로 수소문해 스승을 찾아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꼽는 그녀의 진짜 무기는 재능이 아닌 ‘독기’였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당구 배치가 그려진 그림을 통째로 외우며 큐대를 잡았다. 하루 12시간, 길게는 20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다른 여자 선수들의 서너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손가락이 짓무르고 어깨가 끊어질 듯할 때마다 고향의 가난한 아이들을 떠올렸다. ‘내가 성공해야 저 아이들을 돕는다.’
노력의 결실은 빠르게 나타났다. 큐대를 잡은 지 1년 만에 첫 아마추어 대회 우승컵을 들었고, 2014년부터 3년간 전국 동호인 대회를 휩쓸었다. 2016년 1월 대한당구연맹에 정식 선수로 등록한 그녀는 1년 5개월 만인 2017년 6월 국내 여자 랭킹 1위에 올랐다.
‘캄보디아의 김연아’ 국민 영웅의 탄생
피아비의 성공은 바다 건너 고향을 뒤흔들었다. 현재 캄보디아에서 그녀의 위상은 한국의 김연아에 비견된다. 당구를 모르는 사람도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다.
선수 한 명을 위해 나라가 움직였다. 2018년 6월, 캄보디아 정부는 훈센 총리 주도로 캄보디아당구연맹을 창설했다. 피아비를 위해서였다. 국제무대에 나서려면 자국 당구연맹에 소속돼 있어야 했는데, 당시 캄보디아에는 연맹이 없어 국제대회 출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길이 열리자 피아비는 곧바로 실력으로 보답했다. 2018년 튀르키예에서 열린 여자 3쿠션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땄고, 이듬해에도 4강에 올랐다. 2023년 고국 프놈펜에서 열린 동남아시안게임(SEA게임)에서는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민 영웅’이 된 그녀는 한국과 캄보디아, 두 나라를 잇는 상징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캄보디아를 국빈 방문했을 때 피아비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동포 간담회와 한·캄보디아 비즈니스 포럼에 잇따라 초청됐고, 문 대통령은 포럼에서 “한국에 김연아가 있다면, 캄보디아엔 스롱 피아비가 있다”고 소개했다.
“언니, 저 알아요?”
캄보디아의 국민 영웅이자 한국이 키운 스타.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기자가 직접 만난 피아비의 첫마디는 뜻밖이었다. 2024년 어느 프로당구 대회장. 당구에 관심이 많은 중장년 남성 팬들이 한 선수를 둘러싸고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인파의 중심에는 피아비가 있었다.
팬들이 조금 뜸해진 틈을 타 기자가 조심스럽게 사진을 청했다. 중장년 팬들의 요청에 익숙했던 그녀는 젊은 여성 기자가 다가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저 알아요?”
수줍게 되묻고는 이내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세계를 제패한 당구 여제이자 고국의 영웅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알아봐주는 팬 한 명을 마냥 반가워하는, 순수한 모습 그대로였다.
의사는 되지 못했지만, 고향에 희망을 심었다
그녀는 어릴 적 꿈꾸던 의사는 되지 못했지만, 의사가 아니어도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피아비는 지난 2023년 본지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구 선수도 사람을 치료할 수 있어요. 얼마 전에 한국 의사 열여섯 분께서 캄보디아 의료봉사를 가자고 해서 다녀왔어요. 아픈 캄보디아 아이들은 저를 보고 웃으면서 ‘피아비처럼 되고 싶다’고 해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이렇게 당구로 사람들을 치료하는 거예요.”
실제로 그랬다. 2021년 사단법인 피아비한캄사랑재단을 설립한 그녀는 롯데재단·대한정형외과의사회와 손잡고 5년째 고국에서 의료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녀 덕에 수천 명의 주민이 건강한 일상을 되찾았다.
황무지 위에 학교도 세웠다. 수도 프놈펜에서 북동쪽으로 80㎞ 떨어진 고향 캄퐁참에 부지를 마련해 2023년 전교생 52명 규모의 ‘피아비 초등학교’를 건립했다. 그녀는 지금도 시즌 틈틈이 학용품과 의약품을 가득 싣고 고향 땅을 밟는다.
선수로서의 활약도 현재 진행형이다. 프로 무대로 전향한 이후 정규투어와 팀리그, 왕중왕전 격인 월드챔피언십을 모두 제패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026~2027시즌 현재 누적 상금만 3억8342만원을 넘어섰다. 통산 9승을 거둔 그녀는 ‘여제’ 김가영(19회 우승)에 이어 LPBA 투어 최다 우승 2위이자 상금 3억원을 돌파한 역대 두 번째 여자 선수다.
감자밭에서 가족을 위해 꿈을 접었던 소녀는 이제 한국 프로당구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캄보디아의 국민 영웅이 됐다. 큐대 하나로 운명을 바꾼 그는 자신의 성공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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