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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고민은 쓰레기였다” 김혜자가 65년간 지킨 단 하나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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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기자 sj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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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 뒤에 감춰진, 오늘을 눈부시게 밝히는 대배우의 실존적 지침

현란한 미사여구나 자극적인 가십이 지배하는 문화의 홍수 속에서, 오직 존재 자체만으로 진한 여운을 주는 이름이 있다. 데뷔 65년 차를 맞이한 배우 김혜자. 1961년 KBS 1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대중의 시선 바깥으로 밀려난 전적이 없다.

 

사람들은 김혜자를 향해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그 평온한 타이틀 뒤에는 거친 세월이 숨겨져 있다. 젊은 시절부터 주연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혹독하게 다져온 그녀는, 해외 봉사 현장에서 스스로에게 “서울에서의 고민들은 쓰레기였다”고 뱉어낼 만큼 가혹하게 현실을 직시해 왔다. 요란한 기교나 감정적 과잉 없이도 가슴을 파고드는 그녀의 언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1961년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카메라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은, 원칙과 루틴으로 견뎌온 65년의 기록. 인터넷 커뮤니티
1961년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카메라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은, 원칙과 루틴으로 견뎌온 65년의 기록. 인터넷 커뮤니티

김혜자가 오랜 연기 경력 속에서 방송과 저서, 공식 석상을 통해 남긴 발언들은 화려한 포장 대신 삶의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자전 에세이 ‘생에 감사해’를 비롯한 기록들 안에서 그녀는 스스로의 원칙을 가감 없이 꺼내 놓는다.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몸으로 하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작가가 써 준 것을 내가 연구함에 따라서 내 눈빛이 더 깊어질 것이고, 내 손이 하나라도 더 움직일 것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은 그녀가 걸어온 길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남의 몫을 탐하지 않고 오직 자기 몫의 대본을 파고들며 삶을 지탱해 온 배우의 면모다. 특히 제55회 백상예술대상 무대에 올라 전한 대상 수상소감은 그 어떤 말보다 삶의 궤적을 선명하게 보여준 순간이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직접 자신이 열연했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엔딩 나레이션을 차분히 읊어 내려갔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극 중 배역의 경계를 넘어 심장을 관통했던 그 대사는 현실의 무대 위에서 배우 자신의 목소리로 이어지며 큰 파장을 낳았다. 작품 속 명대사를 빌려 전한 그녀의 진심 어린 당부는 오랫동안 회자되는 명언이 되었다.

공허한 찬사 대신 캐릭터의 내면과 대사의 무게를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증명해 낸 순간. JTBC ‘제55회 백상예술대상’ 화면 캡처
공허한 찬사 대신 캐릭터의 내면과 대사의 무게를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증명해 낸 순간. JTBC ‘제55회 백상예술대상’ 화면 캡처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 읊조림은 평범한 일상의 감각을 성실하게 수행해 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정직한 고백이었다. 해외 봉사활동 당시 스스로에게 던졌던 “서울에서 했던 고민들이 쓰레기 같은 고민이었구나”라는 성찰 또한, 거창한 치장 없이 눈앞의 현실에 몰두해 온 그녀의 방식을 증명한다.

거창한 수식어나 치장을 거두고 눈앞의 현실과 생생한 고통 앞에 정직하게 마주해 온 행보. 월드비전 제공
거창한 수식어나 치장을 거두고 눈앞의 현실과 생생한 고통 앞에 정직하게 마주해 온 행보. 월드비전 제공

우리는 흔히 눈부신 성공이나 극적인 반전을 삶의 목표로 삼곤 한다. 그러나 김혜자가 60년 넘는 세월 동안 연기와 삶을 통해 증명해 낸 것은,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며 하루를 성실히 버텨내는 태도의 미덕이다. 남편의 투병과 이른 별세, 연기에 대한 끝없는 갈증 속에서도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매 순간 대본을 마주했다.

 

원톱 주연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며 대표작을 경신해 온 그녀의 여정은 지친 현대인들에게 억지 위로가 아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흔들리지 않고 매일의 일상을 쌓아 올린 단단한 내면은 그 어떤 수사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억지 위로를 건네는 대신 평범한 일상의 무게를 매일 성실히 감내해 온 이 시대의 실존적 지침. CJ E&M 제공
억지 위로를 건네는 대신 평범한 일상의 무게를 매일 성실히 감내해 온 이 시대의 실존적 지침. CJ E&M 제공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우리의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 후회와 불안으로 얼룩진 시간에 매몰되지 않고, 오늘이라는 단 하루의 무게를 온전히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반세기 넘도록 사랑 받아온 대배우 김혜자가 우리 시대에 남기는 메시지이자, 현재를 버텨내는 모두에게 전하는 포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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