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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역사 속 바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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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27 22:02:02 수정 : 2017-06-28 0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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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개로왕, 바둑 잘 두는 첩자에 속아 / 이순신 장군, 전략 짜는 수단으로 활용
연일 폭염이 계속돼 그런지, 여름날 나무 그늘에 앉아 바둑을 두던 선조들의 모습이 그리운 계절이다. 바둑을 ‘신선놀음’이라 한 것도 그 재미에 푹 빠지면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온갖 세상사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바둑계에 절대강자가 등장했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가 그 장본인이다. 인간 세상의 바둑계를 마구 흔들어 놓고는 더 이상 바둑을 두지 않고 잠정 은퇴 선언한 알파고. 1년 전 한국의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거둔 1승이 한동안 깨지지 않는 신기록으로 남을 공산도 크다 한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바둑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백제의 개로왕은 바둑이 빌미가 돼 결국은 최후를 맞이했다. 5세기 중반 백제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는 첩자 도림을 백제에 보냈다. 도림은 바둑의 달인으로, 개로왕이 바둑에 심취한 것을 알고 개로왕과 여러 차례 대국을 했다. 도림의 바둑 실력을 인정한 개로왕은 ‘국수’(國手)라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화려한 궁궐과 성곽을 지을 것을 건의했고, 이것은 국가재정의 고갈과 인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다시 고구려로 돌아온 도림의 보고를 받은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지나치게 바둑을 좋아했다가 큰 화를 당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통일신라시대 효성왕이 왕이 되기 전에 신충이라는 인물과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고 그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를 잊고 있다가 왕이 된 후 잣나무가 시든 것을 보고 신충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바둑을 ‘박혁’(博奕) ‘기’(碁)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세조는 수시로 신하들이 바둑 경기를 하게 하고 상을 내렸음이 나타난다.

이순신 장군도 바둑을 즐겼음이 ‘난중일기’에 나와 있다. 1593년 3월 12일 ‘식사 후에 우수사(이억기)가 임시로 묵는 방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594년 4월 20일에는 ‘우수사와 충청수사, 장흥부사 마량첨사가 와서 바둑을 두고 군사 일을 의논했다’고 기록해 바둑이 전략을 짜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됐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정운창이라는 인물이 바둑을 잘 두었다는 것이 이서구가 쓴 ‘기객소전’(棋客小傳)에 전한다. 보성 사람 정운창은 당시 국수(國手)인 김종기를 꺾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근대의 인물 중에는 개화파의 핵심으로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이 바둑 고수였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타국에서의 불안함과 허전함을 바둑으로 달랬다. 김옥균이 일본 바둑의 일인자 혼인보(本因坊) 슈에이(秀榮)와 바둑으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는데, 슈에이는 김옥균이 2년간 오가사하라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도 찾아와 3개월간 침식을 같이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김옥균이 망명지에서 애용하던 바둑판이 고국으로 돌아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바둑 고수들의 행적을 떠올리면서 한여름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바둑 한 수를 두는 여유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지?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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