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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 피해자 123명에 지원금 지급… 국가배상은 요원 [지방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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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5-25 18:45:07 수정 : 2023-05-29 13: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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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 지원 나선 경기도

해방 이후 道 운영 부랑아 수용소
진실화해위 ‘아동 인권침해’ 판단
김동연 공식사과 뒤 지원 등 나서
입증 불능·관외 거주 땐 대상 안돼
피해자 “진실규명·명예회복” 강조
“대통령과 국가가 나서 사과해야”
#. “힘든 얘기는 안 하고 싶습니다.”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장인 김영배(68)씨는 손사래부터 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1962년 가을의 서울역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고향인 경기 파주를 떠나 서울 남산 인근 큰누이 집에 머물던 일곱살 ‘영배’는 심부름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서울역 앞에서 경찰에 끌려갔다. 시립아동보호소 등을 전전하다 1963년 5월 안산 선감도(仙甘島)에 있는 선감학원에 보내졌다. 아버지 이름과 고향 집 주소를 댔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5년3개월간 갇혀 지낸 그곳에선 말 그대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배고픔과 구타의 고통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학대를 이기지 못해 바닷물에 뛰어든 아이들은 대부분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왔다. 시체는 야산에 암매장됐다. 고깃배 선장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섬을 빠져나온 건 1968년의 일이었다. 고향 파주를 찾아간 날, 마을 어른들은 모두 목놓아 울었다. 5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김씨는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밤잠을 설치며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거나,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었다”며 “주방장·웨이터·지갑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중장비 자격증을 땄지만 ‘선감도 출신’인 그에게 세상은 잔혹했다.

강원도 탄광으로 들어간 김씨는 광부 생활을 하다가 1990년대에 중장비 사업을 하면서 비로소 가정을 꾸리고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때 친목 모임처럼 만나던 11명의 선감학원 피해자들과 한데 모였다. 김씨는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국가나 경기도는 처음엔 답하지 않았다”면서 “억울한 아이들 수백명의 원혼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과거사를 세상에 알렸고, 피해 생존자들과 유해발굴 현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선감학원 사건이 ‘중대한 아동 인권침해’라고 판단했고, 올 1월 경기도는 지원사업과 희생자 추모사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11명에서 시작한 피해 생존자는 현재 230여명까지 늘었다.

1970년 선감학원에 수용된 소년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배의 잔상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진 선감학원 사건은 생존자들의 증언 덕분에 36년간 이어진 정부의 국가 폭력 사건으로 드러났다. 국가인권위원회·경기도 제공

◆‘소년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경기 안산시 선감도는 아름다운 풍광과 달리 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밴 곳이다. 시화호 간척으로 육지가 됐지만 얼마 전까지 바다에 둘러싸인 낙도였다. 이곳에는 선감학원으로 불리는 소년 보호시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설립돼 해방 이후 경기도에서 직접 운영한 부랑아 수용소다. 피해자들은 이 시설을 ‘소년 삼청교육대’로 부른다. ‘부랑아’, ‘불량아’로 지목돼 수도권에서 끌려온 소년들이 수용됐고, 1982년 폐쇄될 때까지 5000여명의 아동이 거쳐 가며 300명 넘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아이들은 끌려오며 부모·형제의 이름을 외쳤지만, 귀를 닫은 어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기 어려운 곳에서 억울한 사연을 지닌 채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생존자들은 “세상이 내게 왜 그랬냐”, “국가가 인생을 망쳤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경찰이나 공무원이 아이들을 잡아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아동보호소에 넘기면 여러 경로를 거쳐 경기도가 운영하는 선감학원으로 이감됐다.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던 시설은 해방 이후 ‘관치’ 경기도가 맡아 오히려 규모를 키웠다.

25일 경기도에 따르면 진실화해위가 진상규명을 결정한 다음 달인 지난해 11월 도는 ‘선감학원 사건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조례’ 개정 작업에 돌입했다. 국가의 배상과 보상을 위한 법 개정까지 기다릴 수 없어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이다. 지자체가 국가 폭력 피해자에게 생활비와 위로금을 지급하는 건 처음이었다.

숨죽여 지내던 소년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고, 도는 ‘잊힌 소년들’을 위해 우선 위로금 지급 규정을 명확히 했다. 비록 액수는 적지만 지자체 조례에 따른 지원은 피해자들을 돕고 명예를 되살리는 ‘솔로몬의 지혜’가 됐다. 이 상징적 조치로 경기도 역시 아동 인권유린을 저지른 지자체라는 멍에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도는 지난 1월부터 도 의료원 의료비(연간 500만원)와 상급병원 의료실비(연간 200만원)를 지원하고 있다. 위로금(1회 500만원)과 생활안정지원금(월 20만원) 지급도 이어간다.

현재 지원금을 받는 피해자는 모두 123명이다. ‘입증 불능’, ‘사망’, ‘관외 거주’일 경우 지자체 조례의 특성상 지원하기 어렵다. 대신 도는 기존 안산시에 있던 피해자신고센터를 지원센터로 개편해 생존피해자들이 몰려 사는 수원시의 옛 도청 건물로 옮겼다. 도내 거주 피해자에 대한 지원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전문상담사를 배치해 트라우마 해소에 초점을 맞췄다.

선감학원 사건 추모비 설치와 공동묘역 정비 등 희생자 추모 공간 조성도 추진하고 있다. 선감학원 옛 건물도 보존해 아픈 역사를 체험하는 산실로 활용할 계획이다. 지금도 각종 자료를 담은 선감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연간 한 차례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 진실규명·국가배상은 요원

이 같은 조치들의 상당수는 지난해 10월 김동연 경기지사의 공식 사과에서 비롯됐다. 사과문에는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 지원안과 함께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종합대책이 담겼다.

김 지사는 사과문에서 “선감학원 사건은 부랑아 갱생과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가 어린이 수천 명의 인권을 유린한 비극적 사건”이라며 “국가 폭력으로 큰 고통을 겪으신 생존 피해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지사로서 깊은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이어 최근 다시 사과하며 “과거에 자행된 일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이 문제의 사실 규명과 피해 지원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갖고 있다. 지난해 약속드린 대책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생존 피해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별법 제정이나 국가소송을 통한 배·보상에 앞서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김씨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사건에 대해 대통령과 국가가 나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십 년을 숨죽여 지낸 이들은 생존자가 몇 명인지 파악조차 못한 채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선감학원 사건은 2015년 국회에서 진상조사 요구가 이뤄졌고, 피해자들을 처음 만난 건 전임 도지사 때였다. 지난해 9월 진실화해위는 150여명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고통을 못 이겨 모포를 입에 물고 죽은, 끔찍한 인권유린 사실도 확인됐다. 암매장지에서 나온 소년의 나이는 뼈 몇 개와 신고 있던 신발로 추정될 따름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 역시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탈출하다 바다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은 인근 섬 주민에게 붙잡혀 다시 머슴살이를 했다. 13세에 끌려간 안모씨는 3년 만에 돌아온 집에서 사라진 아들 걱정에 술로 연명하다 죽은 아버지 소식을 접했다. 오모씨는 일곱살에 붙잡혀 온 섬에서 종일 고된 노동과 구타에 시달렸다. 통나무를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끼워 무릎 꿇린 채 맞았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가족과 고향을 되찾아도 상처를 곱씹으며 사회의 밑바닥을 떠돌았다. 다시 형제복지원이나 삼청교육대, 청송교도소에 수용되기도 했다.

김씨는 “처음 협의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어릴 적 밥 먹여 줬으면 됐지 이제 와서 쓸데없는 행동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에 있던 사실을 꾸밈없이 얘기하고 기다리며 헤쳐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마순흥 경기도 인권담당관 “역사 되새기는 시설 조성  추모문화제도 개최할 것”

 

“지난 2월 선감도에서 마주한 유해발굴 현장은 참혹했습니다.”

 

마순흥(사진) 경기도 인권담당관은 25일 “선감학원 사건의 본질은 수천 명 아동에 대한 강제수용과 노역, 폭력 등 인권 유린”이라며 “관선 도지사 시절 국가 정책에 따라 부랑아 갱생, 보호, 교육 등의 명분으로 폭력이 자행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에 따라 경기도가 마련한 피해지원 종합계획을 언급하며 상처 치유와 명예 회복을 강조했다. “내실 있는 이행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생활고 경감과 건강 회복 등 실질적 지원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정부의 특별법 제정이 미뤄지며 피해자 지원금과 위로금 등이 ‘지방자치법’, ‘지방재정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도내 거주자에 한정돼 안타깝다”고 했다. 두 법령은 관할구역의 자치사무 처리와 주민 복지증진으로 예산의 사용을 제한한다.

 

결국, 올해만 87명의 피해자가 지원을 받기 위해 경기도로 전입한 상태다. 도는 정부의 일괄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해 국회 등을 상대로 입법지원 활동에 나설 방침이다.

 

도가 주체가 된 유해발굴 사업이 이뤄지지 않는 데 대해선 정부의 책임을 거론했다. 앞서 진실화해위는 선감학원 사건을 정부와 경기도 모두의 책임으로 규정면서도 유해발굴은 ‘자치단체 보조사업’으로 지정했다. 이에 도는 이를 반려하고 정부의 종합대책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정부의 대책은 진실화해위로부터 공식 권고를 받은 지 반년 가까이 지나도록 부처 간 협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마 담당관은 “단순 유해발굴에서 그치면 안 되고 후속조치가 필수라 정부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며 “정부가 종합대책을 마련하면 행정지원 절차에 나서겠다. 행정안전부가 조만간 관련 회의를 갖겠다고 한 만큼 피해자들과 협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옛 선감학원 현장에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시설을 갖추고 공감 가능한 추모문화제를 열어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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