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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해방 그리고 21세기까지… ‘생생한 노동자의 삶’ 담다

입력 : 2024-04-16 20:29:46 수정 : 2024-04-16 20: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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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최종후보 ‘철도원 삼대’ 황석영

1989년 방북 당시 만난 노인과 대화
영감 받은 ‘3代 이야기’ 소설로 펴내
근현대 노동자의 꿈·눈물 등 형상화
심사위원단 “한세기 한국사 엮은 서사”

“고향이 어디십니까.” 평양백화점의 여성 총지배인과 인사를 나눈 뒤 백화점 안내를 맡은 부지배인과 인사를 나눴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부지배인이 옛날식 서울말과 억양을 쓰는 게 아닌가. 북한 당국의 안내로 백화점을 방문한 소설가 황석영은 부지배인에게 물었다.

“서울입니다.” 부지배인 노인은 대답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서울 어디입니까.” 그는 다시 물었다. “영등포입니다.” 영등포는 1947년 가족이 평양을 떠나서 월남해 정착한 곳이었고, 그 자신이 고등학교 시기까지 유년기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는 이날 노인과 백화점 안을 거닐면서 진열된 상품을 보기보다는 옛날 영등포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소설은 요즘 우리가 깔고 앉아 있는 삶이나 현대의 근거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며칠 후, 황석영은 초대소에 간청해 대동강변 수산시장에서 동향의 노인을 다시 만나 소주를 털어 넣으며 그와 가족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등포 철도공작창에 다녔던 아버지, 철도학교에 들어가 기관사가 된 뒤 만주를 넘나들다가 해방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활동을 하다가 미군정의 압박을 받고 월북한 그, 전쟁이 터지자 단기 속성 과정을 마치고 기관사가 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하여 낙동강 전선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

1989년, 방북한 소설가 황석영은 노인의 철도원 3대 이야기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서사라고 생각하고 언젠가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작정만 하고 쓰려다가 그만두고 다음으로 미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몇 해 전, 그는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쓰겠다고, 이것을 쓰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트렁크 2개를 들고 집에서 나왔다. 1년간 자료를 조사하고 준비하고 다시 1년 이상 집필을 이어 간 뒤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0년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창비)를 펴낼 수 있었다. 작품은 최근 영국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부커상 심사위원단은 작품에 대해서 “한 세기의 한국사를 엮은 서사적 이야기”라며 “일제 강점기로부터 시작해 해방을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보통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소설은 45m 높이의 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 중인 이백만의 4대손 이진오가 죽그릇에 용변을 배설하려고 시도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고공 농성을 이어 가면서 현실의 부조리를 조명하는 한편, 페트병에 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대화하는 방식으로 증조부 이백만, 조부 이일철, 부친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노동자 삼대와 그 가족의 삶을 회고하는 진오의 시선을 따라서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나아간다.

강화도 출신의 영특한 증조부 이백만은 열세 살 때부터 요시다정미소의 보조 일꾼을 시작으로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철도국 직원이 돼 영등포 공작창에 자리를 잡는다. 기차에 매혹된 백만은 두 아들 이름을 한쇠(일철), 두쇠(이철)로 짓는다. 일철은 철도종사원양성소를 거쳐 기관사가 돼 만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대륙을 넘나들지만, 동생 이철은 철도공작창에 다니다가 파업에 연루돼 해고된 뒤 노동운동에 매진한다.

하지만 체포된 이철은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고, 일철은 해방 이후 전평 활동을 하다가 미군정의 압박을 받자 월북한다. 아버지와 함께 월북했던 지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철도 기관사가 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가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된 뒤 석방돼 영등포 집으로 돌아온다.

특히 이철을 매개로 일제 강점기 전설적 노동운동가 이재유를 등장시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중의 벽에 맞섰던 이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한편, 이백만의 부인 주안댁과 여동생 막음, 일철의 부인 신금이와 이철의 아내 한여옥 등으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가 더해지면서 리얼리즘을 훌쩍 뛰어넘는다. 특히 홍수가 진 영등포 일대에서 초인적 힘과 지혜로 사람과 물건을 구한 주안댁, 출중한 입담을 자랑하는 막음, 영혼을 볼 수 있는 신통력과 예지력의 신금이 등은 민담 리얼리즘의 새 가능성을 보여 준다.

“‘너 굴뚝 위에 혼자 있는 거 같지?’ ‘할머니하고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그녀는 손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느니.’”

거장 황석영은 왜 ‘철도원 삼대’를 써야 했을까. 그가 형상화한 한국 근현대 100년에 걸친 노동자의 삶과 죽음, 꿈과 눈물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황 작가를 전화 통화는 물론, 2020년 6월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와 2020년 12월 인천문화재단 북콘서트 등을 통해서 만났다.

―중심인물 일철과 이철 형제의 행로가 엇갈리는데.

“형 일철은 집안을 감당해야 되겠다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도 있었고 공부도 잘했다. 이철은 형처럼 공부에 열중하지 않다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며 자각한 뒤 노동운동에 나선다. 형은 어려운 길을 가는 아우에게 미안해하면서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1970∼1980년대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특히 영혼을 보는 신금이 할머니의 모습은 인상적인데.

“신금이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이씨 집 기둥이고, 손자 진오에게 과거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 신금이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재미있게 생각한 인물은 앞잡이부터 시작해 경찰서장까지 출세하는 야마시타 최달영이다. 악역이지만 굉장히 잘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영등포를 중심으로 장소성도 강력하다.

“영등포라는 도시는 원래 인천 때문에 생겨났다. 이전에는 세곡선이나 삼남에서 오는 배들이 강화와 한강을 거슬러 마포로 들어왔는데, 식민지 근대화가 되면서 제물포가 인천이 되면서 항만이 생기고 경인철도가 생기면서 영등포가 형성됐다. 저는 근대 도시의 자식이다. 어릴 때 영등포역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나 기관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이번 작품이 염상섭의 ‘삼대’와 대비되기도 하는데.

“염상섭의 ‘삼대’가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식민지 자본주의 근대를 조명한 소설이라면, 저의 ‘철도원 삼대’는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 3·1 운동 이후부터 식민지 자본주의, 한국전쟁과 분단을 거쳐서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염상섭의 ‘삼대’가 한국 근대소설의 입구라면, ‘철도원 삼대’는 그 출구라고 할 수 있다.”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서 서울 영등포에서 자란 황석영은 1962년 단편 소설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고 1970년 단편소설 ‘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객지’, ‘삼포 가는 길’, ‘한씨 연대기’,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해질 무렵’ 등을 발표했다. 많은 작품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간됐고, 만해문학상, 단재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앞으로 계획은.

“현재의 건강 상태로 따져 보면 90까지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부지런히 써서 세 권 정도 더 쓰면 생각하고 있는 어떤 만년의 소설 양식을 보여 주면서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이름을 ‘민담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해 본다.”

몇 해 전 군산에 터 잡은 그는 해가 지고 달이 뜨면 비로소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늦은 밤부터 꼭두새벽까지 글을 쓰고 또 쓴다. 마치 밤도깨비처럼. 내일의 태양이 뜨면 그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다시 분주한 하루를 맞을 것이다. 세상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낙관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 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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