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제정권자인 국민은 헌정사에서 군의 정치개입을 반복하지 않고자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헌법에 명시했지만, 국군통수권자인 피청구인이 정치적 목적으로 권한을 남용해 군인들이 또다시 일반 시민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4일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면서 언급했던 이 문장은 지난 80년간 한국에서 나타난 민·군 관계와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불거진 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1945년 광복 이래 군은 호국의 방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도 했지만, 정치권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국가와 국민을 상대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부터는 민주주의의 울타리로서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국토방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 과정에서 국내의 민·군 관계 연구는 군에 대한 문민 통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5·16과 12·12 쿠데타를 겪으며 정착된 현재의 헌정 체제에선 군부가 민간 정부 통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정치적·학문적 논리를 갖춘 문민 통제 개념이 자리잡았고,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위해 구성·발전된 군 지휘·통제 체계가 겹겹이 더해졌다. 장군들은 민간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구축해온 민·군 관계와 군의 정치적 중립에 큰 구멍이 있었음을 드러냈다. ‘지도자 리스크’라는 구멍이다. 기본적으로 장군들과 군 통수권자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군 수뇌부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최종 결정은 군 통수권을 지닌 정치 지도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도자 리스크는 여기서 발생한다. 군 통수권자가 올바른 결정을 하면 다행이지만, 부적절한 결정을 내리면 큰 후폭풍이 불어닥친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흔드는 결정이라면 그 파장은 나라를 뒤흔든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대표적이다.
최고지도자에 의해 군의 정치적 중립이 흔들리는 사태를 방지하려면, 군의 노력과 더불어 민간도 군을 깊게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군 통수권을 지닌 정치 지도자는 헌법 정신에 입각해서 국방 분야를 다루는 일이 원래 자신의 업무였던 것처럼 전문적으로 국방 현안을 처리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 이를 토대로 전략적 차원에서 군을 지휘·통제할 능력도 확보해야 한다. 이는 12·3 비상계엄 사태로 싹튼 군 내 혼란과 의구심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군 수뇌부와의 관계 설정도 중요하다. 군 통수권자와 장군들 간 관계는 국방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군 통수권자가 행사하므로 평등하진 않다. 하지만 관계의 불평등이 소통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과거와 달리 군을 움직이는 것은 안보 외에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가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다. 따라서 군 통수권자와 장군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소통은 서로 대등하고도 긴밀한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군 수뇌부는 전문적 조언을 통해 군 통수권자의 부당한 군령권 행사를 견제할 수 있고, 군 통수권자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신중함을 더할 수 있다. 군의 특성과 영향력, 민·군 관계, 헌법이 정한 통치구조 등을 이해하면서 장군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군 통수권자.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최고지도자의 모습일 것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