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부모님 모습에 깨달아
더 큰 후회와 슬픔 남지 않게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찾아야
유디트 헤르만 ‘아쿠아 알타’(‘단지 유령일 뿐’에 수록, 박양규 옮김, 민음사)
팔순 넘은 부모가 가까운 나라에 잠시 다녀오기로 해, 내가 짐을 꾸려주고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떠나는 모습을 대문 앞에서 지켜보았다. 조금 전 짐을 꾸릴 때 쓸데없는 음식과 옷을 많이도 가져간다고 퉁명스럽게 굴던 딸에게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선심 쓰듯 마지못해 한 손을 들어 올리다가 문득 내 부모는 평생 단둘이 여행이란 걸 해본 적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뿐 아니라 맏딸인 내가 부모를 모시고 어딘가를 가본 적도, 여행이라고 할 만한 시간을 가져본 적도 없다는 것을. 몇 년 전 가족여행을 갈 때도 나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대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 ‘아쿠아 알타’가 영화처럼 떠올랐다. 소설 속 서른 살 생일을 앞둔 딸은 부모와 하루 동안 베니스를 여행한다. 나와는 다른 시점 화자인 그녀를 따라 빨려 들어가듯 읽었던 기억도 난다. ‘아쿠아 알타’는 강의 범람이라는 뜻인데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의아했던 게 집을 나서는 늙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꺼내 읽으니 짐작이 가 조금 서글퍼졌다.
미래도 불투명하고 연인과도 헤어진 그녀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 자식들이 독립한 후에야 여행을 시작한 부모는 그 무렵 베니스에 있을 거라고, 그 도시에서 조우하자고 했다. 그녀는 부모가 여행을 갈 때마다 배웅했는데 기차가 떠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슬픔 중에서도 가장 유치한 슬픔이” 자신을 온통 사로잡는다고 느꼈다. 부모님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부모를 방치한 건 자신을 비롯한 자식들이라고. 그러나 자유롭고 싶은 이 시점에서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베니스에 들르는 건 망설여졌다. 낯선 곳에서 부모를 보는 일이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색했고, 가족을 만나는 일에는 늘 희미한 불안이 따라다니곤 하니까.
부모의 숙소를 찾느라 광장을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꼬마야!” 숙소의 발코니에서 자식이 자신들에게 걸어오는 순간을 몇 시간째 기다리고 보고 싶었던 부모는 성년의 딸을 어릴 적 별명으로 불렀다. 딸이 관광객들 속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그들은 낯선 나라에서 처음 만났다. 기쁜 마음은 거의 날아가 버리고 모든 게 초라하고 슬퍼 보이기만 한 채로. 저녁 자리에서도 부모는 별것 아닌 일로 서로를 탓하고 짜증 내고 상처를 주고, 그러다가는 어색하게 웃고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도 이상하다. 부모가 살아 있고, 지금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심시키며 “사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라고 새삼 알게 되는 게.
이제 그녀는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부모가 늙으면 그들과 여행을 하리라고. 매번 부모와 헤어질 때는 “후회와 슬픔”이 몰려오고, 시간은 아직 있지만 줄어들 테고 자신을 오랫동안 보호해 왔던 사람은 부모였으므로. 부모를 보호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부모와 헤어진 후 그녀는 숙소의 불이 켜질 때까지 창문 앞에서 기다린다. 잘 주무시라는 인사도 따뜻하게 하지 못했지만. 아까 성당의 종소리가 들릴 때 아버지는 말했다. “빛.” “저 빛, 빛에 뭔가 눈에 띄는 게 없니?”라고.
아쿠아 알타. 강의 범람은 언젠가 도시를 완전히 물에 잠기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지우고 사라지게 할 것이다. 살아 있어서, 이곳에서 늙은 부모를 만나는 기대와 불안과 서글픔과 안도와 고마움과 수많은 감정이 그녀에게 범람하고 흐른다. 부모는 서로를 부축하듯 잡고 딸과 헤어졌다.
언제나 시간이 많을 거라고 여겨왔다. 부모와 여행도 하고 더 좋은 것도 함께 볼 수 있는. 나는 부모가 잔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며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벌써 지치고 힘에 부친 듯. 그들은 그런 나이가 되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사이에. 부모가 떠난 집에서 비로소 부모 생각에 잠긴다. 우리가 좀 더 함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아직 시간이 있다는 건 착각일지 모른다. 부모를 볼 때의 그 범람하는 감정 중 마침내 슬픔과 후회만 남게 될지도.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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