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 생선 썩은 내가 진동해서 세 정거장 만에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왔어.”
7월 초 섭씨 34도를 넘긴 영국 런던에서 에어컨 없는 시내버스를 탔다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외국인 친구의 이야기다. 하필 퇴근 시간에 잡아탄 런던의 2층 버스는 땀에 전 옷을 걸친 승객으로 가득차 움직일 수조차 없었고, 숨을 쉴 때마다 쉰내가 코를 찔렀다. 이 극한 상황에서도 무덤덤한 영국인들 틈에서 외지인인 그는 도저히 견디지 못해 하차하고 말았다고 한다.

같은 기간 런던에 머무르며 냉방이 되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실내온도가 33도에 육박하는 가운데 수업을 듣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런던의 여름은 오랫동안 20도 초중반의 온도를 유지해왔지만 최근 수년째 극심한 폭염이 1∼2주에 사나흘씩은 찾아오는데, 며칠만 견디면 또 괜찮아져서인지 에어컨 설치율이 여전히 낮다.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들이 저마다 불평을 늘어놓은 데 비해 런던 시민 대부분은 여기에 적응한 듯했다. 미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작은 불편함들을 감수하고 사는 문화의 연장인가 싶었다. 거리를 가로막는 집회, 약자를 배려하는 조치 등에 따른 불편에 토 달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무더위 앞에서도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하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또는 공공요금 민영화나 자본 불평등 심화로 ‘냉방은 언감생심’ 체념하게 된 자본주의 끝판왕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결말일 수도 있다.
불현듯 한국에서는 이런 참을성을 기를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스쳤다. 대중교통, 대학교, 상점, 공공기관 등 웬만한 실내 공간은 쾌적한 냉난방 설비를 갖추고 있다. 전기요금도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폭염은 에어컨을 켜서 순식간에 해결하면 되는 문제다. 이맘때면 “카페 가서 돈 쓰는 것보다 집에서 에어컨 트는 게 저렴하다”, “껐다 켰다 하는 것보다 에어컨을 계속 켜두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등의 조언이 넘쳐난다. 냉방을 얼마나 할지의 문제이지 ‘에어컨 없는 삶’ 같은 건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이런 한국의 장점은 역설적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기 쉽다. 부족함 없이 냉난방을 누리는 삶은 정말 당연한가. 버튼 하나로 삶의 쾌적함이 좌우되는 현실에서 그 버튼 누를 수 있는 한 안도하며 살아가면 그만일까. 모두에게 똑같이 닥쳐오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철저히 자본으로 결정되는 사회는 진짜 살기 좋은 곳인 걸까.
한국에서도 누군가는 냉방기기 없는 집과 일터에서 그저 혹서를 버틴다. 이는 종종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된다. 폭염 속 옥외 노동자 사망, 쪽방촌 온열질환 문제 등은 매해 여름 단골 뉴스다. 하지만 이 비극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되기 일쑤다. 동정하는 시선이 있을지언정 소수자들의 아우성을 제대로 듣고 바꿔보려는 노력은 미비해 보인다.
구성원 간의 격차, 그로 인해 완전히 달라지는 삶의 질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인간 존엄이 달려 있는데도 마냥 남의 일처럼 무감각해지곤 한다. 런던의 열파 앞에서 평등하게, 하는 수 없이 땀에 흠뻑 적셔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 감각이 더 무뎌졌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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