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구석 텃밭에 기대다보니
민심 사로잡을 ‘맥놀이’가 없어
간절함이 있어야 기적 만들 것
회사 인근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어 종종 들른다. 그중에서도 3층 ‘감각전시실:공간_사이’ 전시관은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이곳에서는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의 소리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체험할 수 있다. 높이 3.6m에 달하는 에밀레종을 한 번 치면 깊고 웅장한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그 여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소리의 주파수 변화를 생생하게 관찰할 수도 있다.
부처 가르침을 알리려 만든 에밀레종의 그윽한 울림 속에는 물리학이 숨어있다. 하나의 주파수만으론 밋밋한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미세하게 다른 주파수가 보태져야 소리가 파도처럼 진동하며 울림이 깊어진다. 이런 현상을 ‘맥놀이’라고 한다. 무릎을 쳤다. 지금 우리 정치에 절실한 게 딱 맥놀이다.

얼마 전부터 한국 정치에선 같은 주파수를 가진 팬덤 정치가 득세하고 있다. 낯선 진동은 가차 없이 잘린다. 여의도에는 같은 편에게만 흥겨운 울림, 그 밖의 이들에겐 거슬리는 쇳소리만 가득하다.
보수정당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한창이다. 차기 당대표에 나선 이들이 일주일 동안 페이스북에 올린 메시지를 살펴봤다.
김문수 후보는 ‘체제 수호 vs 체제 전복’이라는 구도를 전면에 내세웠다. 종북과 반미 등 젊은 세대와 중도 유권자에겐 낯설고 거북한 단어가 수두룩했다.
장동혁 후보는 “싸우지 않으려면 배지를 떼라”며 전투력을 강조했다. 내부 성찰보다 외부 투쟁에만 몰두한 듯한 메시지는 혁신보다 대결을 부추겼다.
안철수 후보는 ‘유일한 무결 보수’라고 자처하며 강성 이미지와의 단절을 내세웠다. 하지만 정당 개혁을 위한 시스템 혁신 비전은 구체성이 부족했다.
조경태 후보는 실용 보수와 극우 단절을 말했지만 ‘실천할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한 설득력은 약했다. 주진우 후보는 당 운영구조 개혁을 공언했지만, 경험과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물음표를 남겼다. 그러다 보니 언론의 관심은 혁신 경쟁은커녕 극우 프레임과 탄핵 논쟁의 진흙탕 싸움에만 쏠린다.
2004년 탄핵 역풍으로 총선에서 참패한 한나라당은 이듬해 박근혜 대표 체제 아래 여의도 당사를 떠나 ‘천막당사’를 차렸다. “쇼하는 거냐”는 비아냥 속에서도 국민은 ‘다시 시작하겠다’는 안간힘에 공감했다. 그 덕분에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정치적으로 재기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누구보다 강한 보수 이념을 내세웠지만, 다른 주파수와도 공명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는 세금 감면과 작은 정부, 자유시장이라는 전통적 보수의 기치를 내세우면서도, 고소득층만이 아니라 중산층과 블루칼라 노동자층(이른바 ‘레이건 민주당원’)을 포괄하는 설득력 있는 메시지 전략을 구사했다.
지금 국민의힘 당권 주자들은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서로 다른 주파수가 충돌하고 있지만 웬일인지 ‘정치적 맥놀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 원인이 절실함의 부재라고 본다. 보수 텃밭인 영남에서는 여전히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정치적 현실이 그들의 위기의식을 흐리고 있다.
수년간 꼴찌를 맴돌던 한화 이글스가 올해 프로야구 정규시즌 1위를 달리고 있다. 예년과 달리 모든 게 완벽해져서가 아니다. 올해도 초반엔 하위권을 맴돌았고, 작년에 많은 돈을 주고 데려온 자유계약선수들은 죽을 쑤고 있다. 그럼에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모든 건 ‘가을야구’에 대한 절실함 때문이다. ‘보살팬’이라 불리며 꼴찌일 때부터 한결같이 운동장을 채우는 그들의 염원은 포스트시즌 진출이다. 김경문 감독은 스타 감독이지만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다. 우승에 대한 간절함이 그와 선수들을 움직인다. 숱한 실패에도 한화 구단은 대전야구장을 신축하고 메이저리거 류현진을 복귀시키는 등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간절함이 한화의 고질적인 실책을 줄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변화가 쌓여 고유의 승리방정식을 만들어냈다. 보수정당의 텃밭인 대구·경북(TK) 민심마저 흔들리는 지금, 전당대회 후보들이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바뀐 이글스가 증명하듯, 간절함이 기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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