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분노보다 성찰, 배척보다 포용

관련이슈 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10-27 23:03:15 수정 : 2025-10-27 23:03:14

인쇄 메일 url 공유 - +

‘치평요람’이 들려주는 혼란 극복의 길
정치는 한쪽의 옳고 그름으로 단정 못해

나는 우리 역사 기록 속에서 ‘이야기’, 특히 읽는 이로 하여금 숙고와 성찰을 끌어내는 서사가 부족한 점이 늘 아쉬웠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 시대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한 ‘치평요람’은 각별하다. 그 안에 담긴 한국인의 이야기는 마치 오랜 사막길 끝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의 샘물과 같다. 오늘 아침 읽은 고구려의 한 이야기도 그러했다.

1라운드 · 두 형제의 선택 : 제9대 고국천왕이 승하하자, 왕비 우씨는 한밤중에 첫째 아우 발기를 찾아가 왕위 계승을 제안했다. 그러나 발기는 “임금의 자리를 경솔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라며 거절했고, 오히려 한밤의 방문을 꾸짖었다. 모욕감을 느낀 왕비는 그 아래 동생 연우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고, 이튿날 새벽 연우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스토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2라운드 · 반란과 참회 : 연우의 즉위 소식에 발기는 분노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것이 예인데, 어찌 순서를 뛰어넘어 왕위를 찬탈하느냐.” 그는 군사를 일으켰으나 나라 지도층들이 따르지 않았다. 요동으로 달아난 발기는 군사 3만을 빌려 고국을 침공했으나, 아우 계수의 군대에 패했다. 패주하는 발기에게 계수가 말했다. “연우 형이 왕위를 양보하지 않은 것도 의롭지 못하지만, 형이 분노로 나라를 멸하려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형은 장차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을 뵈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발기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목을 베었다. 여기까지가 2라운드이다.

3라운드 · 용서와 회복 : 계수는 형의 시신을 거두어 귀국했다. 그러나 왕이 된 연우는 그를 의심했다. “너는 발기의 죽음을 너무 슬퍼했으니,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구나.” 계수는 눈물로 답했다. “형이 왕비의 제안을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의리를 다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형의 덕을 완성하고자 시신을 거두었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부족하여 의혹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 네 말을 듣고서 내 허물을 깨달았다.” 왕은 발기를 국장의 예로 장사 지내게 하고,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에 따라 형수 우씨를 새 왕비로 맞이했다.

한국 고대의 비극 한 편을 읽으며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첫째, 왕비 우씨는 왜 한밤중에 시동생들을 찾아갔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그녀는 초기 고구려 중앙 귀족 세력인 연나부(椽那部) 출신으로, 국왕이 바뀐 뒤에도 자신의 가문이 권세를 잃지 않기를 바랐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발기를 새로운 정치적 연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둘째, 발기는 왜 형수이자 왕비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라 그랬을까· 그러나 그보다는 정치적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한 듯하다. 왕비 우씨의 제안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권력을 연장하려는 연나부의 계략으로 보였던 것이다.

셋째, 계수의 태도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분명한 판단력과 균형감을 보인 인물이 바로 그였다. 계수는 형 발기를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해치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새로 즉위한 왕 연우에게도 “눈물을 흘리며” 왕의 도리를 깨닫게 했다. 그는 분노보다 성찰을, 배척보다 포용을 택하게 했다. 정치란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으로 단정할 수 없는 세계임을 이해한 성숙한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두 형, 발기와 연우 모두 그의 말을 듣고 스스로를 내려놓았다.

‘치평요람’의 편찬자들이 계수의 언행을 가장 상세히 기록하면서 전하려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스스로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포용할 때 비로소 혼란의 시대가 끝난다는 교훈이 아니었을까.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오피니언

포토

초아, 청량한 분위기
  • 초아, 청량한 분위기
  • 박보영 동안 미모 과시…상 들고 찰칵
  • 41세 유인영 세월 비껴간 미모…미소 활짝
  • 나나 매혹적 눈빛…모델 비율에 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