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두 국가론’ 프레임 빠지는 꼴
대만의 ‘中 지우기’ 모양새 비슷
남북관계 특수성 잃지 말아야
최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남북관계를 언급하며 ‘한·조(韓·朝) 관계’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남북관계든 한·조 관계든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해서 남과 북이 함께 공동이익을 창출해 나가길 강력히 희망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남북을 동족이 아닌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자, 일단 북한의 표현대로 ‘조선’을 인정해주며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현실론에 입각한 것이라지만 북한의 프레임에 스스로 빠지는 자해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 측에서 ‘두 국가론’이 나온 게 처음도 아니고, 이후 정 장관이 “감성적 통일론이나 감성적 단일국가론보다 현실에 기초한 ‘평화적 두 국가론’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설명했지만 ‘조·한(한·조) 관계’라는 북한의 용어를 정부 고위 당국자가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또 다른 의미다.
특정 대북 정책에 대해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책은 정권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대전제가 흔들리면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근본적인 우려에서다.
남북 간의 특수관계를 부정하고 일반적인 국가 간 관계인 ‘한·조 관계’를 공식 수용한다면 통일부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북한의 의도대로 ‘조선’이라는 타국을 인정하는 순간 헌법 제3조가 규정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는 영토 조항은 무력화된다. 통일이라는 명분이 사라진다면 통일부의 이름도 차라리 ‘반도관리부’나 ‘조선연락부’ 같은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북한의 표현을 존중해주면 대화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낙관론도 공허하다. 북한은 이미 애국가에서 ‘삼천리’를 삭제하는 등 철저한 ‘남남’ 선언을 마쳤다. 우리가 그들의 표현에 화답한다고 해서 북한이 대화에 나선다는 보장은 없다.
흥미로운 대비점이 대만이다. 최근 대만 민주진보당(민진당) 정부는 한국 전자입국신고서의 ‘CHINA(TAIWAN)’ 표기에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는 생트집에 가깝다. 민진당 정부는 반중 성향임에도 정작 ‘하나의 중국’ 원칙을 폐기하는 등의 결단은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정명 운동’으로 중국 지우기를 시도한 적도 있지만 지금 당장 대만이 모든 명칭에서 ‘중화’나 ‘중국’을 지우고 독립을 공식화한다면 중국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중국은 이를 명백한 분열 시도로 규정하고 내정이라는 명분으로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며 무력 침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결국 중국보다 우리가 좀 더 만만한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 텐데, 전자입국신고의 직전출발지·다음목적지를 없애는 방식으로 대만 항의를 수용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 아쉽다. 그러나 북한이 먼저 던져버린 ‘하나의 한국’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내던지려 하는 상황은 더욱 아쉽다.
현실적으로는 ‘그나마 덜 적대적인 두 국가’정도가 되겠지만 ‘적대적 두 국가’가 ‘우호적 두 국가’가 된다 한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이 북한과의 특수관계를 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북한 문제에 대한 유일한 당사자 지위를 잃게 된다. 북한에서 급변 사태가 터지거나 중국이 북한을 자국 경제권에 편입하려 할 때, “옆 나라 일에 왜 참견하느냐”는 중국의 논리에 대항할 명분이 사라진다. 결국 ‘한·조 관계’의 수용은 북한을 중국의 위성 국가로 헌납할 위험이 커 보인다.
실제로 올해 초 북·중 교역액이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베이징∼평양을 잇는 철길과 하늘길이 다시 열린 것 등은 중국이 북한을 통제하고 있으며, 북한의 대외 창구를 중국이 차지하겠다는 신호다. 이는 향후 미국과의 본격적인 협상을 앞둔 중국이 “북한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우리”라는 점을 부각해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본지 표기에서는 국가 간에 이뤄지는 일을 보도할 때 가운뎃점을 찍어 북·미, 미·중, 한·일 등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남북’만은 가운뎃점 없이 붙여 쓴다. 타국 간의 관계와는 궤를 달리하는 특수성을 지면의 문법으로 지키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도 남북 사이를 가운뎃점으로 갈라놓아 ‘한·조’라는 낯선 표현을 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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