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3400억원… 북미 2주째 1위
사상 첫 전편 아이맥스 촬영 화제
트로이 목마 속 병사 고통에 초점
망자와 대화 연출 등 강렬한 잔상
전쟁은 끝났지만 영웅의 내면에서는 끝나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는 트로이를 무너뜨린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를 기세등등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이 주도한 학살의 기억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으로 그린다. 약 2800년 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는 놀런의 손에서 모험과 승리의 찬란한 영웅담이 아닌,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을 탐구하는 서사로 다시 태어났다.
놀런 신작 ‘오디세이’(8월5일 개봉)는 이타카 왕 오디세우스(맷 데이먼)가 ‘트로이 목마’ 계책으로 10년에 걸친 전쟁을 끝낸 뒤 또 다른 10년의 귀향길에 오르는 이야기를 그렸다. 고향에서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왕비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에게 야만스러운 구혼자들이 몰려들고, 어린 왕자 텔레마코스(톰 홀랜드)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바다로 나선다.
줄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해 바다의 신의 분노를 산다. 거인족, 마녀 키르케, 세이렌, 머리 여섯 달린 괴물 스킬라까지 신화 속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머릿속에 남는 것은 괴물도, 신도 아니다. 승전을 이끈 영웅이지만 결코 전쟁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한 인간의 얼굴이다.
놀런의 관심은 영웅의 업적이 아니라 전쟁 이후의 삶에 있다. 러닝타임 172분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죄책감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죽은 부하들은 그의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놀런의 전작 ‘오펜하이머’와 맞닿는다. 두 작품 모두 자신의 선택이 남긴 파괴의 대가를 평생 감당해야 하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트로이 목마를 바라보는 시선도 신선하다. 그리스군에게 승리를 가져온 천재적 전략의 상징이었던 목마는 이 영화에서 거대한 감옥처럼 그려진다. 그리스 정예병들은 좁은 목마 안에서 익사의 공포와 배설물의 악취를 견디며 몇 날 동안 숨을 죽인다. 영화는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병사들이 감내해야 했던 육체적 고통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위장한 자신의 계책이 인간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린 속임수였음을 인정한다. 그는 그리스군이 저지른 학살과 희생된 동료들의 죽음도 외면하지 않는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총명하지만 오만하고, 용감하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복잡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가 반복해서 말하는 “우리 청동기 시대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영화 핵심을 압축한다. 그가 애도하는 것은 전우들의 죽음만이 아니다. 트로이 전쟁과 함께 무너진 한 시대와 문명이다. 그의 죄책감은 개인 차원을 넘어 시대 전체를 향한다.
거대한 서사 속에서도 몇몇 시퀀스는 유독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오디세우스가 죽은 병사들과 대화하는 시퀀스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 순간 중 하나다. 베일에 싸인 영혼들은 땅 위를 기며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문다. 얼굴에 검댕을 뒤집어쓴 시논(엘리엇 페이지), 거대한 갑옷 속에 갇힌 듯한 아가멤논(베니 새프디) 모습은 악몽처럼 스크린을 채운다. 키르케(서맨사 모턴)가 오디세우스의 병사들을 점토를 주무르듯 천천히 돼지로 바꾸는 장면 역시 육체가 붕괴하는 기괴한 순간을 촉각적으로 전달한다.
그리스·모로코·이탈리아·아이슬란드·스코틀랜드 등 세계 각지에서 촬영한 자연 풍광은 압도적이다. 광활한 바다와 절벽, 거대한 동굴은 신화를 현실의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이 신화적 세계를 스크린 위에 구현하기 위해 투입된 제작비는 약 2억5000만달러(34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고대 그리스 때부터 전해지는 원전 독자라면 아쉬움을 느낄 부분도 있다.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를 속이며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Nobody)’라고 소개하는 기지는 빠졌고, 귀향에 결정적 기여를 한 나우시카 공주 이야기도, 아버지 라에르테스와의 감동적 재회 장면도 과감히 생략됐다. 그러나 이는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오디세이’는 북미에서는 지난 17일 개봉해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27일 오전 기준 글로벌 흥행 수입은 6억3960만달러(약 9350억원)를 돌파했다. 국내에서는 아이맥스 예매 경쟁이 특히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 놀런은 이 영화를 역사상 처음으로 전편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국내에는 70㎜ 필름 상영관이 없지만, 1.43:1 화면비를 지원하는 아이맥스 상영관에서는 감독이 의도한 압도적 규모를 가장 가깝게 경험할 수 있다.
신화를 빌려 인간을 이야기하고, 승리를 통해 패배를 말하며, 전쟁 영웅담을 가장 현대적인 반전(反戰) 서사로 탈바꿈시킨 놀런의 연출은 왜 그가 동시대 가장 위대한 영화 창작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지 다시 확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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