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자국의 종전협상서도 제외돼
남의 일 같지 않은 한국의 입장
지정학적·경제적 레버리지 정비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열린 미국과 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오른편에 있는 책상에 벨트가 하나 놓여 있었다. 복싱 애호가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준비한 우크라이나 헤비급 복싱 챔피언 올렉산드르 우시크의 ‘챔피언 벨트’였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을 끝내려면 미국의 도움이 절실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영국, 일본 정상처럼 트럼프 대통령과 성공적으로 회담을 마무리하고 활짝 웃으며 챔피언 벨트를 전달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을 꿈꿨지만 물거품이 됐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영국, 일본 정상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찰스 3세 국왕의 국빈 방문 친서를 전달하며 화려한 의전을 동경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대선 유세 중 습격당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당신을 구한 건) 신의 선택이었다”며 화려한 ‘아부의 기술’을 선보였다.
그렇다고 이들이 회담장에서 보인 ‘레토릭’만으로 환심을 산 것이 아니다. 이면엔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얻을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타머 총리는 미국 방문에 앞서 “2027년 영국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5%로 늘리고 2035년까지 3%로 인상하겠다”며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국방비 인상폭을 발표했다. 이시바 총리는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확대 의사를 밝히고, 미국에 1조달러(약 1458조원) 투자를 약속했다. 거기에 더해 2027년까지 방위비를 2배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내민 ‘카드’가 있었기에 트럼프 대통령도 회담에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회담에서 환심을 사기 위한 발언을 하고, 선물을 준비했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에 우크라이나는 가진 것 없는 약소국에 불과했다. 두 정상이 설전을 벌이는 중 트럼프 대통령이 직설적으로 내뱉은 “당신이 가진 카드는 없다”란 한 마디가 이를 방증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군사적 지원에 대한 대가로 광물 개발을 통한 수익 등 보상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안보 보장 없이는 협정이 불가하단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가진 카드가 없는’ 국가가 미국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줘도 모자랄 판에 조건을 들이대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보는 시각차도 컸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잔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포로 사진을 보여주면서 푸틴 대통령에 대해 “살인자이고 테러리스트”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기자회견에서 “푸틴에 대한 그(젤렌스키)의 혐오 때문에 내가 협상을 타결하는 게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종전 협상에서 배제된 우크라이나의 현재 상황은 북한과 대립하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오히려 미국이 한국을 제치고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할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우리는 리더십 부재로 정상 외교가 차질을 빚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적나라한 행태를 재확인할 시간을 벌었다.
그래도 한국은 꺼내들 카드를 가지고 있다.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지정학적 위치뿐 아니라, 반도체, 조선 등 첨단 산업 분야의 기술력을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업가 출신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미국에 얼마큼 이익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줄 구체적인 숫자다. 미국에 얼마를 투자하고, 미국에 얼마나 이익이 될지를 보여 줘야지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윤석열정부가 강조한 ‘가치외교’는 이제 꺼낼 필요조차 없게 됐다. 미국과 협상에 대비할 카드도 필요하지만, 중국을 비롯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활용할 카드도 늘려야만 한다. 미국만 바라본다고 답이 나오진 않는다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한 달여 만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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