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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기억을 기록하는 방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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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16 22:58:14 수정 : 2025-09-16 22: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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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사진 명소’ 골목길은 과거 전쟁의 격전지
역사의 상처 지우고 행복의 공간으로 변신

지인으로부터 모바일 청첩장을 받았다. 지인의 아들이 새신부와 환하게 웃는 결혼사진의 배경이 낯익다. 내가 최근에 거주했던 연희동 골목이다. 심지어 우리 집 담벼락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신랑과 손을 맞잡고 있다. 이들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기록하는 장소로 오래된 골목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묘한 공간이다. 결혼사진 속에서 이곳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의 아픔이 깃든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연희동 104 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탈환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지인의 청첩장을 받던 그날 공교롭게도 6·25 참전용사였던 친구 부친의 부고를 받았다. 장례식장에 가는 내내, 한 공간에 대한 양극단의 기억이 사정없이 뒤섞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버지가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문득 떠오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천수호 시인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서울 탈환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당시 연희동은 전략적 요충지로, 104m의 나지막한 산에서 남북한 2000여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참혹함을 기억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는 궁동산 언저리에 ‘해병대 104 고지 전적비’를 세웠다. 시간이 흘러가고 그 세대가 사라졌지만, 전쟁의 기억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기억을 기록하는 방식은 예술 작품으로도 승화된다. 고통의 시간을 ‘살아내는’ 인간으로서 작가는 자신만의 기억을 작품에서 풀어놓는다. 현재 교대 샘 미술관에서 열리는 ‘시간의 결’이라는 전시가 바로 그 예다. 이 전시는 시간이 남긴 흔적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 기억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연희동과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시간의 양면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 작품 중 전쟁의 기억과 생존의 시간을 탐구하는 작품에 주목하게 된다.

영국의 토머스 D 라이트는 전쟁의 유물을 캔버스로 삼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방독면을 포장했던 상자에 자신의 자화상을 담았다. 한때 공포의 방패였던 방독면 상자의 닳고 닳은 표면에 현재를 살아가는 자기 모습을 담아내면서, 전쟁의 상처를 잘 견뎌내고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을 기록한 것이다. 고통을 극복한 세대가 있었기에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다. 작품 속 라이트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고정되어 있고 입술에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다. 마치 방독면에 의지해 살아남은 숨결 끝에 평화의 올리브잎이 돋아난 것 같은 이미지다. 역사의 상처는 판지의 주름 속에 남아 있지만, 그때의 시간은 한 장의 그림으로 전시되어 또 한 번 우리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미국 작가 페기 시버트의 작품 ‘희생자들, 가자 우크라이나’에도 관심이 간다. 이 작품은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각화하고 있는데, 기록의 의미로 고문헌의 파편을 재료로 삼는다. 무너진 건물과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고문헌과 천 조각을 찢어 테두리 배경을 메운다. 마치 망가진 건물의 구멍으로 전쟁의 현실을 직접 내다보고 있는 듯한 구성이 현장감을 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전선이 격화되고 휴전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기록한다.

햇빛 좋은 날이면 연희동 골목에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을 종종 본다. 신랑의 어깨에 기댄 행복한 미소는 그곳에 그들만의 특별한 기억을 새기는 순간이다. 연희동은 오래전 전쟁의 기억을 지우고 행복의 공간으로 변했다. 이처럼 시간은 우리의 기억에 반복과 축적을 거쳐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간다. 샘 미술관의 이번 전시가 작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시간의 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2명 작가의 다층적 시간 앞에서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감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과거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될 것이며,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끊임없이 연결되므로.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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