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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연락 차단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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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16 22:56:00 수정 : 2025-10-16 22: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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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거리 없는 형식적인 통화
때로는 불편·고통으로 다가와
쉽게 끊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착한 사람 콤플렉스인지 의문

오랫동안 연락을 끊지 못한 사람이 있다. 형뻘인데 형이라고 불러본 적은 없고, 마지못해 불러야 할 때면 선배님이라고 얼버무린다. 서로 알고 지낸 지 삼십 년쯤 된다. 이십 대 때 시민단체에서 서로 안면을 익힌 인연이 있다. 십여 년 전에 그가 반갑게 전화를 해왔을 때 나는 어렵사리 그를 기억해 냈다. 서로 각별하게 지낸 기억은 없었다. 그때부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계절에 한 번씩 안부를 물어왔다. 잘 지내는가? 창작은 잘 되나? 언제 한번 만나자…. 그와의 전화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매번 똑같다. 나 역시 별일 없냐, 좋을 때 만나자, 건강히 지내시라고 대답한다. 딱할 정도로 우리는 다른 대화거리를 찾지 못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평생 이런 통화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에서 만난 사람과 십여 년을 이런 통화를 지속하는 일은 고통이다.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 교수

그는 경기 어느 도시에 산다. 그가 가정을 이루었는지 직장을 다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 환갑이 다 되었을 그가 삼십 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없다. 아주 가끔 그는 통화 말미에 자기가 쓰고 있다는 영화 시나리오 이야기를 한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이라고 한다. 완성하면 꼭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 레퍼토리도 십 년째 반복되고 있다.

통화를 하다 보면 선배가 조금 아픈 사람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목소리가 몹시 잠겨 있고 숨소리가 거칠다. 나는 ‘어디 아프세요?’ ‘술 드셨어요?’ 하고 묻곤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고만 대답한다. 우리가 준비한 대사는 금방 끝난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를 아프다고 생각하는 건 균형감이랄까 눈치랄까 그런 게 없는 걸 말한다. 항상 내가 먼저 바쁜 척하면서 통화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죄책감이 남는다.

그의 전화는 수업 시간, 회의 시간, 식사 시간, 주말을 가리지 않는다. 전화를 받지 못하면 이튿날이라도 기어코 다시 걸어온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무례하지 않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폐를 끼칠 의향이 전혀 없다. 그저 때맞춰 안부를 물어올 뿐이다. 가족 말고 나에게 오직 안부가 궁금하여 전화를 해오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전화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수신 차단 기능을 몇 번이나 매만졌는지 모른다.

그 선배를 잘 아는 지인을 만나 나는 선배와 연락하고 지내는지 물었다. 아직도 그 사람 전화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네, 하고 그는 의아해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나는 물었다. 그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통화를 해본 네가 잘 알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바쁜데 정말 쓸데없는 전화를 하는 사람이지.

그는 올해 들어 부쩍 자주 전화를 해온다. 반갑지도 않은데 전화를 받아주는 게 옳은지, 혹 내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삿된 사람은 아닌지 괴롭다. 그는 무해한 사람이고, 정말 나를 아끼는 사람일 수 있다. 나는 어쩌면 그가 전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 모른다. 나마저 연락을 차단하면 그는 누구에게 전화를 할지 걱정이 된다.

올 추석 동안 나는 병상에서 지냈다. 응급수술을 받고 침상에 누워 있자니 마음이 복잡하고 우울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자꾸 따지게 되었다. 어김없이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순간 나는 그 선배가 병인이라도 된다는 듯 화가 났다. 그 선배와의 관계를 여기까지 끌고 온 나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 모른다. 선배가 예의 ‘잘 지내세요?’ 하고 안부를 물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어금니를 물고 대답했다. “선배, 내가 몹시 아파요. 당분간은 선배 전화를 못 받을 것 같아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났더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을 훑고 갔다.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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