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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휘은의 이상한 노이즈] 선언의 유효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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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진정 국가의 운명이라면
잠시 걸치는 휘장이어선 안 돼
미래는 선언자의 무대가 아닌
끝까지 남아 책임지는 사회 몫

지도자의 자질은 미래를 말할 때 드러난다. 위기가 목전의 불을 가리키는 행위라면,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만드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인공지능(AI) 강국이 되겠다는 선언은 야심 찰 수밖에 없다. 반세기 전 원조와 개발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던 나라가 이제 기술 패권의 최전선에 서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언만 놓고 보면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후속 행동이 없는 선언은 어디까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계획을 지속 가능하게 할 제도와 인프라는 더디게 쌓이는데, 주류 담론은 정치적 음모와 스캔들의 짧은 열기에 쉽게 휩쓸린다. 대한민국 미래의 한 축을 맡았던 AI 수석이 채 1년도 되지 않아 여의도 입성의 뜻을 밝혔다. 항간에서는 그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의 자리가 어떤 책임을 요구하는지 우리의 지도층이, 우리의 사회가 진지하게 물어본 적은 있었는가?

역사는 기술 패권이 선언으로 완성된 사례를 기억하지 않는다. 1960년대 프랑스는 미국에 맞서 독자적인 기술 주권을 천명하며 핵 억지력과 함께 이른바 ‘계획 기술 국가’의 청사진을 그렸다. 그것이 구호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랑제콜과 국가 연구소를 잇는 수십 년의 제도적 생태계 덕분이었다. 반면 소련은 1950년대 초 사이버네틱스를 ‘부르주아 과학’으로 낙인찍어 연구를 탄압했다. 우주 경쟁과 시장 개방을 거치며 뒤늦게 복권시켰을 때 이미 기술 발전의 골든 타임은 흘러 있었다. 냉전이라는 총력전 속에서 이념이 기술보다 앞섰던 나라는 결국 기술에서 패했다. 성패를 가른 것은 국가의 의지와 화려한 발언보다는 나라를 뒷받침할 사회가 불확실성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감내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반휘은 칼럼니스트
반휘은 칼럼니스트

핀란드의 사례는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진실을 보여준다. 2000년대 초 노키아는 세계 휴대폰 시장을 사실상 지배했고, 핀란드 수출의 상당 부분을 홀로 책임졌다. 그렇기에 2010년대 초 노키아가 무너졌을 때, 국가적인 혼란이 와도 놀랍지 않았을 상황에서 핀란드 사회는 패닉 대신 재편을 택했다. 노키아 출신 엔지니어들이 수백 개의 스타트업으로 분산되었고, 국가는 이미 갖춘 인프라를 바탕으로 신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기술 역량이 한 기업이나 한 부처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혁신이 제도를 통해 흡수될 수 있을 때, 한 기업의 종말이 산업 전체의 종말로 이어지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한 나라의 기술 경쟁력을 판단하는 진짜 기준은 정상에 있을 때가 아니라, 무너졌을 때 드러난다.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모든 기술의 발명은 상응하는 사고(accident)를 발명한다고 썼다. 배를 만들면 난파를 발명하는 것이고, 기차를 만들면 탈선을 발명하는 것이다. AI를 발명한 나라는 AI의 실패를 함께 껴안을 수 있는 제도와 문화, 사회적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한국의 압축 성장은 이런 불확실성의 근육을 기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우리는 (마땅한 이유로) 오래 기다리는 법보다 빨리 따라잡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어제의 결핍을 오늘의 성취로 바꾸는 데는 탁월했지만, 내일의 모호함을 견디는 데는 서툴다. 트렌드에 빠르게 편승하고, 밝은 셈으로 극대화된 수익을 확인한 뒤, 다음 파도를 찾아 이동하는 것. 기술을 소비하는 것과 기술을 건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시간적 이해를 요구한다. 속도는 언제나 책임보다 먼저 도착하고, 책임은 대개 영수증처럼 뒤늦게 발견된다. 현재 우리에게는 전자의 언어만 넘친다.

그렇다고 이것을 사회의 근시안이라 비판하는 것은 부정확한 진단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사치에 가깝다. 불안한 부동산과 고용 시장은 성장에 투자한 비용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안에서 당장의 수익과 즉각적인 효과에 집중하는 것은 생존에 특화된 합리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빨리빨리’ 정신만큼 숙달된 망각의 속도로 미래의 담론을 구축해 왔다. 어느 날은 메타버스, 어느 날은 코인. 그리고 다음 날은 AI와 반도체가 국가적 운명처럼 불려 나온다. 사람들은 격변하는 파도에 동원되지만 설득되지는 않는다. 빠르게 열광하는 만큼 피로가 쌓이는 사회에서 유행이 지나가면 책임자는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은 빚이 된 기대를 붙들고 서 있다. 미래는 집단 공동의 약속보다는 특가가 매겨진 단기 상품처럼 팔리고 있다.

좁고 짧은 기술 패권의 창에서 우리는 미래를 너무 자주 소비한다. 수려한 발표문 속에서 그려지는 미래는 웅장하지만 일상 속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대한민국은 세계 수준의 반도체 역량, 촘촘한 통신 인프라, 어느 나라보다 빠른 디지털 적응력이라는 실질적 자산을 손에 쥐고 있다. 그 디딤돌 위에 서 있으면서도 우리는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다음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다. 발화자만 달라지는 반복적인 선언들 속에서 사람들은 이탈하고, 사회의 관심은 다음 스캔들로 옮겨 간다.

경쟁은 공백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미래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미래를 감당할 준비를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메뚜기떼처럼 한 시절을 덮고 지나간 뒤 남는 잔해는 이상하게도 늘 개인의 몫이다. 사회의 역할은 구성원을 이끌어 가면서 동시에 이런 실패를 준비하고, 이를 흡수하며, 그 위에 다시 쌓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술이 허울로, 혹은 경력의 경유지로 전락하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AI가 진정 국가의 운명이라면, 그것은 누군가의 경력에 잠시 걸치는 휘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는 선언하는 자의 무대가 아니라 끝까지 남아 책임지는 사회의 몫이다.

 

반휘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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