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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공연장에서 만난 안내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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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30 23:25:47 수정 : 2025-10-30 23: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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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조끼’ 입고 객석으로 입장
연주·환호·박수에도 미동 없어
주인 곁서 묵묵히 자기 일 수행
음악회보다 그 ‘의연함’에 감동

공연장 로비에서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노란 조끼를 단정히 입은 안내견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지나며, 한 걸음 뒤에서 주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등에 달린 조끼에는 ‘안내견’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실 공연장에 안내견이 들어오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낯설지도 않다. 법적으로도 안내견들의 출입은 보장되어 있고, 대부분의 공연장은 안내견의 입장을 환영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문이 열리고 한 여성과 안내견이 천천히 객석 사이를 걸어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쏠렸지만, 안내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침착하게 걸어 들어왔다. 마치 이미 수많은 공연장을 지나온 노련한 관객처럼, 그 공간에 익숙한 듯한 걸음이었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마침내 음악이 시작되고, 안내견은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 관객들처럼 숨을 죽였고,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연주가 점점 고조될수록 객석의 공기도 팽팽해졌지만, 안내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짖지도 않고, 몸을 돌리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마치 자신이 ‘소리 내지 말아야 하는 청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공연장에서 안내견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의 발소리, 낯선 향기, 화려한 조명, 그 모든 자극 속에서도 안내견은 오직 주인 곁에서 가만히 머무른다. 그 침묵은 훈련의 결과이자, 책임감의 표현이다. 개는 인간과 달리 음악의 아름다움이나 연주의 완성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공연을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가 안전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공연 내내 안내견의 시간은 길고 고요했다. 미동도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객석 전체가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혼자서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때때로 조명이 미묘하게 바뀌거나, 관객이 프로그램을 넘기는 작은 소리가 나도, 안내견은 눈을 한 번 깜빡일 뿐이었다. 객석의 모든 시선이 무대로 향해 있을 때, 그 조용한 존재는 아무 말 없이 공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자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안내견은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소리, 밝아진 조명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주인의 다리 움직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안내견도 고개를 들었다. 아주 부드럽게 자세를 고쳐 세운 뒤, 주인을 한 번 바라보고,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꼬리도 세게 흔들지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마치 이제 내 역할이 끝났다는 듯, 담담한 걸음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기억난다.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공연의 여운을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안내견의 걸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소리 없이,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한 존재가 자꾸 떠올랐다. 음악의 감동보다 더 마음에 남은 건, 그 고요한 생명체가 보여준 의연함이었다. 그 안내견은 그저 단순한 반려견으로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세상을 지탱하기 위해 온 존재였다. 공연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완벽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로 공연이 시작될 때마다 문득 그 안내견을 떠올린다. 객석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숨을 고를 때, 어딘가에서 또 다른 안내견이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무대 위의 연주자들이 음악으로 세상을 감동시키는 동안, 그 발밑의 조용한 존재가 또 한 명의 관객을 세상과 연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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