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기후의 미래] 진화하는 전쟁의 기록

관련이슈 기후의 미래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10-23 22:46:28 수정 : 2025-10-23 22:46:28

인쇄 메일 url 공유 - +

전쟁으로 잿빛이 된 가자지구
생명뿐만 아니라 환경도 파괴
국제법상 책임 묻기도 어려워
법적 근거 마련 보호의 첫걸음

“우리의 여로는 가자시까지 이어졌다. 이집트에서 오면 여기가 바로 첫 샴(Sham, 레반트 지역) 땅이다. 시가는 구획이 정연하고 건물들이 많으며 상가도 훌륭하다. 사원도 여러 개이고 성벽도 둘러 있다. 원래 이곳에는 장려한 대사원이 하나 있었다. … 건물이 우아하고 건축술이 정교하며 강단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이븐바투타 여행기)

가자에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14세기 탐험가인 이븐바투타는 장장 30년간 3개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남긴 여행기에서 가자를 번영과 질서, 신앙이 공존하는 풍요로운 도시로 그렸다. 이븐바투타가 가자를 거쳐 가기 전과 후 다른 학자들이 남긴 기록에도 가자는 ‘나무가 너무 많아 땅 위에 금실 자수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한 도시’라거나 ‘빵과 좋은 포도주가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대사의 질곡은 풍요의 기록을 먼지 속에 파묻었다.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건물들, 잔해와 오·폐수 가득한 하천…. 오늘날 가자지구는 바람 한 줄기도 슬프게 지나가는 잿빛 땅으로 변했다.

윤지로 사단법인 넥스트 수석

전쟁은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생명이 의지하던 환경까지 파괴한다. 유엔환경계획(UNEP)이 한 달 전 펴낸 ‘가자지구 분쟁의 환경 영향’ 2차 보고서에 따르면 과수의 97%, 한해살이 작물의 82%가 파괴됐다. 작물이야 또 심으면 되지, 싶지만 초지와 휴경지의 89%, 덤불의 95% 역시 파괴된 데다 군용 차량에서 흘러나온 기름, 미처리 하수로 토양오염이 심각한 상황이다. 약 25만채로 추정되는 가자 내 건물의 78%가 손상되거나 무너져 6100만t의 잔해가 발생했고 그중 15%는 석면, 중금속 같은 유해 물질이다. 하수도관도 대부분 파괴됐으므로 관리되지 않은 폐기물은 결국 빗물을 타고 바다에 이른다. 보고서는 “어류 공급망의 오염 통제장치가 사라졌고, 독성 어류가 식탁에 오를 위험이 크다”고 적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통로로 생태적으로 중요한 와디 가자 습지가 50% 손상됐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환경에 남긴 상처는 심각성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당장은 덜 시급하고 덜 고통스러운 문제로 여겨졌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환경 피해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인과관계 입증도 까다로워 국제법적으로 책임을 묻는 일도 난망했다.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전쟁터의 망가진 환경 앞에 흰 국화를 놓는 일 정도였다.

그런데 인공지능(AI) 같은 기술 발달로 전쟁 환경 피해를 다루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오픈소스 데이터와 지구관측 데이터를 결합해 에너지 기반시설이나 벌채 같은 환경부문에 초점을 맞춰 장기 추적 자료를 쌓아간다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 플랫폼에 올라오는 현장 이미지를 토대로 파괴가 일어난 시기와 위치를 하나하나 파악할 수 있다. 전체 피해 규모를 추정하는 것을 넘어 개별 피해를 높은 해상도로 분석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시리아 내전 중 석유 인프라가 파괴되자 무장단체(ISIS)는 수입원을 마련하기 위해 곳곳에 임시 정제소를 만들었다. 이런 정제소는 유독한 증기를 방출하고 토양을 오염시키지만 수천개로 추정되는 정제소를 위성 이미지로 일일이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분쟁지역 오픈소스 데이터 분석에 특화된 유럽의 벨링캣과 팍스는 유럽우주국(ESA)의 지구관측위성에서 얻은 광학·레이더 이미지와 이미 알려진 일부 정제소 위치를 조합하고, 석유 오염 지역을 식별하도록 AI 모델을 훈련했다. 이런 방식으로 정제소와 기름 유출을 식별하는 프로세스를 수천㎢에 걸쳐 자동화해 5개 지역에서 5700여곳의 임시 정제소를 확인했다.

피해를 구체적으로 정량화할 수 있게 되면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4대 범죄에 생태범죄를 추가하려는 논의도 정치적으로 힘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 ICC 검찰국은 처음으로 ‘로마규정(ICC 설립규정)에 따른 환경범죄 정책’ 초안을 발표해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환경 파괴 주체(국가지도자)에게 개인적인 형사책임을 묻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2023년 10월 시작된 가자전쟁이 2년여 만에 불안한 휴전을 맞았다. 진화하는 전쟁의 기록이 가자의 풍요로운 과거를 복원하는 첫걸음이 되면 좋겠다.

 

윤지로 사단법인 넥스트 수석


오피니언

포토

박보영 '눈부신 미모'
  • 박보영 '눈부신 미모'
  • 41세 유인영 세월 비껴간 미모…미소 활짝
  • 나나 매혹적 눈빛…모델 비율에 깜짝
  • 비비업 킴 '신비한 매력'